김정운(2014). 에디톨로지. 21세기북스



김정운(2014). 에디톨로지. 21세기북스


저자의 책을 모두 사서 읽는 몇 안되는 지은이 
깊은 학제적 개론서를 기대했는데, 평이한 글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남는 건 그의 말처럼 '창조는 편집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받아들인다!"라는 기막힌 문장으로 일본 문화를 정의한다(7). 


'이이토코도리', 즉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일본식 문화 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세이고는 주장한다(9). 


언제나 그렇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의 '선택적 지각'이라고 한다(19).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24).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26)
-> 성경적 견해


'지식-정보-자극', 에디톨로지는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먼저, '지식knowledge'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다. ... 새로운 지식이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 '정보information'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stimulus'이다!(30) 


인지발달 심리학자 피아제는 생각의 본질을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presentation' 즉 '보여주다'라는 의미에 반복을 뜻하는 're-'가 붙은 것이다.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생각이란 어디서 한 번은 본 것을 머리속에 다시 떠올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머리속에 떠올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32) .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35). 


우중충한 아저씨들이 다들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에 살면서, 다들 똑같은 양복을 입고, 다들 똑같은 검은 자동차를 타고 출근해서, 다들 똑같은 헤어스탕일로 창조를 논하는 한, 창조경제는 어림없는 소리다(38).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여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43).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47). 


지식 편집의 권력이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1년에 1,000만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배워야 하는 대학 강의 대부분은 이제 아주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다(50)
-> 꼭 학적을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황우석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은 지식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종이 위에 쓰인 텍스트 중심의 논문식 지식 편집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A4용지에 글자 크기를 정하고, 각주/미주/참고문헌의 작성요령에 따라 쓰인 텍스토로서의 논문을 심사하고, 폼 나는 가운 석/박사 학위를 주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대학의 지식 편집권력을 이미 끝났다. / 이제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지식 구성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에디톨로지'에 기초한 '하이퍼텍스트Hypertext'시대, 즉 탈텍스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51). 


천재의 생각은 날아다닌다. ... 김정주는 자신의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내 구체화했다(53). 


인간과 의식의 행동은 도구에 의해 매개된다. 숟가락을 들면 '뜨게' 되어 있다. 젓가락을 손에 쥐면 '집게'되어 있다.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되어 있고, 나이프를 들면 '자르게'되어 있다. 평생토록 하루에 세 번씩 '뜨고' '집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고 '찌르고' '자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의 의식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훨씬 공격적인 이유다(54).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및 '비교가능성comparability'이다(68). 


(하버마스 왈)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73)


가끔 이러령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개념 구성을 '말장난'이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말장난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말장난 중에 최고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말장난이 아니던가? 변증법의 핵심 개념으로 '지양止揚'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식 번역으로는 아주 폼 나보이고 그럴 듯하다. 도무지 못 들어본 단어이기 때문이다(75). 


이러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79).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나가라고 한다. 석사/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84).
-> '자기 생각'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것을 하나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 편집 가능성이다. 그게 전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카드에 정리한다. 카드 맨 위에는 키워드를 적고, 그 밑에는 그것과 연관된 개념(요즘 식으로 인터넷의 '연관 검색어')을 적고, 출처와 날짜 등을 차례로 적는다. 그리고 카드의 앞/뒷장에 그 내용을 빼곡히 요약한다. 피아제, 비고츠키, 융과 같은 심리학자의 책을 읽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 나간다. 이렇게 모인 카드는 주로 알파벳 순으로 정리한다. 내가 쓰려는 논문의 순서에 따라 정리하기도 한다. 이 같은 카드 정리는 필기에 비하면 상당히 번잡스럽다. / 자기 생각이다. 독일 학생들은 모은 카드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편집한다.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카드를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발달'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프로이트, 피아제, 비고츠키, 융의 이론을 자기 기준에따라 다시 정리한다. 이때 정리는 그저 알파벳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설정한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카드를 편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카드가 바로 자신의 이론이 된다(87). 


남의 이론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편집할 수 있는 카드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편집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카드로 축적된, 편집 가능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database'라고 한다. 이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가 오늘날에는 너무 쉬워졌다. 예전에는 일일이 책을 읽으며 옮겨 적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검색하고, 'Ctrl+C' 'Ctrl+V'하면 된다. 이제 실력은 '잘 찾아내는 것know-where'에 있다. '검색'이 곧 실력이라는 이야기다(88). 


그러나 지식 편집의 즐거움을 한 번 깨닫게 되면 인터넷 서핑처럼 즐거운 경험은 또 없다. / 예를 들어,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은 사진기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언제든지 인터넷에 접속해 학습할 수 있고, 고양이나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들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얼마든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런 공부가 진짜 공부다. 놀다보면 공부가 저절로 되기 때문이다(96). 


포털 사이트는 이 태그들을 모아 각 태그들이 겹치는 지점을 찾아낸다. 그 결과,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지식의 새로운 분류법이 생겨난다. '폭소노미folksonomy'다. 폭소노미는 'folk' 'order' 'nomous'의 합성어로 '사람들에 의한 분류법'이란 뜻이다. 소수 전문가들에 의한 분류법을 뜻하는 '탁소노미taxonomy'에 빗댄 표현이다(97). 


정보와 정보의 새로운 편집을 가능케 하는 창조적 발견은 절대 논리적 사유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 사유의 전형적 형태인 연역법deduction과 귀납법induction은 순환논리다. 주어진 법칙을 통해 사례를 설명하는 연역법은 설명적 추론explicative inference이다. 현상을 기존 법칙으로 설명할 뿐, 새로운 인식과는 상관없다. 그 반대인 귀납법도 마찬가지다. 사례에서 법칙을 이끌어내는 귀납법은 평가적 추론evaluative inference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연역법은 그 현상이 '반드시must'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귀납법은 그 현상이 '실제로actually' 그렇다는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 미국의 논리철학자 피어스 C.S.Peirce는 창조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제3의 추리법을 주장한다. 유추법abduction이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아마도may be'의 창조적 추론innovative inference을 뜻한다. 검색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아마도'의 질문 때문이다(100). 


영상에 실제 나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공의 목소리를 창조해내는 것은 바흐친 소설 미학의 '폴리노니polyphony, 다성성 多聲性'의 영상적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의 폴리노리란 음악에서 2성부 이상의 선율이 서로 대위법적으로 얽혀 들어가며 이제까지 없었던 음악적 감동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소설 또한 무수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서로 맞부딪치며 갈등과 화해의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111).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119)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119-121).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은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적이다(132).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전체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136).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156). 


사회적 경력/학력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학력/경력 없이도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깊은 자기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명함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다. / 인간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바로 '나'다. ... 자신에 관한 텍스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 즉 기억으로 구성된다. 나는 '과거 기억의 편집'이다(275).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이른바 '일리의 해석학'이다. 이를 내러티브 심리학에서는 베리시밀리튜드verisimilitude라고 정의한다. 국어로는 여실성如實性 혹은 핍진성逼眞性으로 어색하게 번역된다. '아주 그럴듯하다'는 뜻이다(276). 


잡스의 정서적/모순적/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283).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비판심리학'을 포기하고 비고츠키의 문화심리학으로 '전향'했을 때, 이유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학자들이 있다. 어빙 고프만 Erving Goffman,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es, 노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미하일 바흐친 Mikhail Bakhtin,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등이다. ... 서구 사회과학에는 두 방향의 상반된 이론적 흐름이 존재한다. 한쪽에는 '발달Entwicklung' 개념에 기초한 '사회Gesellschaft'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구성Konstruktion' 개념에 기초한 '문화kultur'가 있다(287). 


오늘날 사람들은 헤켈의 발생반복설과 찰스 다윈C.R.Darwin의 자연선택설에 기초한 진화론을 자주 헷갈려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헤켈의 이론에는 발달 방향이 정해져 있는 반면, 다윈의 진화론에는 발달이 어느 방향으로 이뤄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290). 


신동 모차르트의 이런 즉흥연주 능력 또한 생득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아스의 주장이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아들에게 아주 혹독한 도제식 훈련을 받게 했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유럽의 유명하다는 선생은 다 만나게 했다(299). 


천재는 사회 문화의 변동이 한 역사적 개인에게 편집되어 나타나는 우연적 결과다. 따라서 자식이 신동이라도 천재로 만들겠다고 달려들 이유가 전혀 없다. 어차피 모든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신동이다. 자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천재가 되면 요행이고, 안 되면 다행이다. 천재는 일찍 죽거나, 혹시라도 오래 살면 죄다 불행히지기 때문이다(303). 


이젠 많이 기울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이 대세다. 우리 세대가 눈 뜨고 있을 동안에는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팍스 아메리카나'다(306).


민족은 근대 이후에나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307).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 책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365).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십 넘어 새롭게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기기도 하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372).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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