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2014). 단속사회. 창비




이론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의 분석이 날카롭다. 
잘 읽혀지는 책. 

무엇보다 사회를 선언이나 설명하기보다는 해명하려는 그의 철학에 공감한다. 




엄기호(2014). 단속사회. 창비


'곁'이 있는 글을 강조하며 곁에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곁'이 없거나 악몽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두가지 원리로 가시성과 사회적 고립을 꼽는다. 사무실에서 벽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누구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가시성이 강화될수록 친밀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의한 서로의 감시만 증(57)가한다. 이 상태에서 개인은 "침묵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게 되고 침묵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통된 감정은 바로 공포감이다(57-58). 


그래서 지혜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표정에서부터 말투까지 철저히 자신을 단속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다. 지혜는 이에 대해 자신이 "교사들 앞에선 감정을 지워버렸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짐작할 수없다면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신이 손에 쥔 패는 함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상황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평생 같이 못 가요. 그리고 누군가와 같이해야 할 상황을 만들지 마시고 최대한 자력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으세요.'이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곧 자신의 생존방식으로 삼았다(64). 


성취감은 더이상 '내 안에서 우러나는 느낌'이 아니다. 산을 오르다 능선에 올라 그 아래를 바라보며 느끼는 환희 같은 성취감은 어느새 수자로 대체되었다(76). 


우리 각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가 되어야 하며, 다른 누구와의 삶과도 다른 '바로 나'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제는 표준화된 삶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개별화된 삶에 대한 강요만 남았다(92). 


이제 우리는 기본적으로 '네'하며 순종하는 주체가 아니라 '아니오'라고 반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존재가 된다(110). 


진정성(authenticity)는 자신만의 고유한 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진정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만의 방, 즉 사생활이 필요하다(114). 


그런데 오히려 이 사생활이 없는 공간이 중산층의 이상이 되다니! 멀쩡한 단독주택도 부숴 그 땅을 엮고 또 엮어 재개발하여 아파트를 짓는다. 대규모로 지으면 뉴타운이요, 소규모로 지으면 주상복합 아파트 한 채, 그도 저도 아니면 빌라라도 짓는다. 관계도 사라지고 프라이버시도 없는 이 공간에서의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은 오로지 아파트의 자산가치다(125). 


이 개인이 추구해야 하는 덕목은 바로 진정성이다. 기든스는 "개인적 성장은 우리 스스로를 진정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 막는 감정적 장벽과 긴장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이와 같이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것'에 기초한 진정성"이 바로 자아실현의 도덕적 끈이라고 말한다(133). 


진정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것은 좀더 깊고 성숙한 내면의 세계를 가진다는 의미다. 인간의 내면이야말로 세계와 불화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진정을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단절하고 내면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의식"한다(133). 


자유는 시장자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는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그 욕망이 자신에 의해 점검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수현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보(138)였던 많은 것조차도 사실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강요였다. 진정한 자유는 그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에서 나온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자신이 선택한 것을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에서 자유는 시작된다. 고대의 현인들이 여기 있었다면 참다운 자유란 욕망을 절제하는 것, 즉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했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고 고독한 상태가 되는 것에서 비로소 자유는 시작된다(138-139). 


이처럼 우리는 '함'의 과잉상태에 빠져있다. 우리는 늘 뭔가 하는 것을 통해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140). 


여행의 본연의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142).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이처럼 이미 자기 자신을 전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아닐까. 현대인들을 소진시키는 '함'이란 이(146)처럼 과시하고 전시하는 '함'에 다름없다. 이 시대의 속물들은 하는 척한다고 바쁜 것을 '함'으로 착각한다. 자신이 진짜 원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46-147).


노동경제학자 류동민의 말을 빌리면 이익은 위로 가고 위험은 아래로 분배되는 것이 이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다(161). 


학교의 문제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주류 경제학)의 교육현장의 교과서에서는 노동을 다루지 않는다(196). 
-> 마찬가지로, 삶도.. 


한국의 학교는 노동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충실한 훈육기관이기도 했다. 이들이 훈육하는 것은 '몸'이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 걸맞은 몸을 만드는 것이 학교의 가장 큰 기능이었다. 어떤 몸인가. 바로 "지루함을 견디는 몸"이다. 류동민은 전기 자본주의 혹은 산업화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모델에서 필요로 한 노동자의 능력과 덕목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라고 말한다.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된 노동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씨스템이 되어 지루함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노동력"을 만드는 곳이 학교였다는 말이다(199). 


그러나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하고 뒤를 돌아봐야 한다. '점검하는 삶'은 멈추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점검하는 삶에서 '멈춘다'는 것은 곧 주저함을 의미한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안다'라는 확신에 속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배려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리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의 의견에 귀기울여야 한다. 내가 맞을 확률을 더 높여줄 수도 있고, 나에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검하는 삶은 자신의 확신을 괄호로 묶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삶이다. 배움에 주저함이 없는 삶, 배움을 위해 타자와의 만남에 주저함이 없는 삶이 바로 이 '점검하는 삶'이다(236). 


그런데 스스로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주체는 더이상 자기 경험을 확장하지 않는다. 성장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의 삶은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의 단편과 파편으로만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성장이란 자기 삶을 연속적으로 흐르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는 의지와 그것이 의미있고 가능할 때에만 이뤄진다. 파편적인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245). 


그것은 곧 타자와의 만남이다. 만남이 없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그저 구경하는 관광에 불과하다(246). 


타자는 나에게 내 세계의 협소함을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내 세계의 안온함을 일깨워주는 존재다(249). 


그(바우만)는 서구 복지국가의 사례를 들어 근대의 국가가 하는 일이 잉여/배제/폐기 같은 삶의 불확실성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고 삶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근대 국가의 야심은 노동의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미래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삶을 기획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시민이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258). 


말 걸기와 경청을 통해 비로소 남은 '너'가 된다. 그의 고통에 찬 얼굴을 보고 고통이 밴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를 외면할 수 없다. 나와 남 사이에는 '거리'만 있지만 나와 너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는 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다시 안녕을 서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고통받는 얼굴을 대면할 때 우리는 응답(response)하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할 수 없게 된 목소리, 배제할 수 없게 된 얼굴로 떠오는 남, 그 남이 '너'가 아닌가. 이렇게 남이 '너'가 될 때 이 '너'는 다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대체되지 않는다. 환원되지 않는 존재, 대체되지 않은 관계.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대체 가능하게 만드는 '수의 정치'에 맞서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말 걸기와 경청은 사회적 배제와 맞서는 정치적 행위다.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말을 거는 행위인 경청은 배제의 정치, 수의 정치에 맞서는 삶의 정치가 된다(279).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아실현을 위해 다른 모든 존재를 도구화한다. 그는 타자를 착취하여 소진케 하고 결국엔 버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불신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볼 뿐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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