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로빈슨 (2001).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일곱 가지 법칙 (유소영 역, 2007). 한길아트

 


2013년이었던가 사놓은 책을 이제 읽었다. 


이 책의 원본은 2001년에 쓰여졌는데, 그 당시에도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는 듯 하다. 


요새 김누리 교수가 지적한 과거 인적자원부에 대한 비판이 더욱 의미있어지는 책이다. 


사람은 '자원'이 아니다. 켄 로빈슨의 지적대로 모든 사람의 창의적이다. 모든 사람의 자신이 재미있는 분야가 있고, 교육 시스템이 그것을 찾도록 도와 줘야 한다. 


그러나 한국 경우 사회 시스템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 하는데, 최소한 방향성은 알고 가야 할 듯 하다. 


아래는 내게 의미있었던 부분 발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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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타고난 능력을 개발하고 성취에 대해 보상하는 과정이라는 생각, 학교와 대학은 지적으로 뛰어난 학생을 골라내면 된다는 생각, 지능이 뛰어난 학생은 공부를 잘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시각이다. 교육은 타고난 능력을 그대로 살려주지 않는다(10).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더 잘하는 것만으로는 미래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기준 자체가 잘못됐을 때 기준을 높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11). 


교육제도 안에서 개인의 능력이 이렇게 낭비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 즉 특정한 학문적 능력(academic ability)을 전반적인 지능과 혼동하여 다른 능력을 무시하고 오직 그것만 개발하는 편견이다. 이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재능과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더 이상 이러한 희생을 감내할 수는 없다(14). 



학문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학문적 능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문제다. 학문적 능력은 인간 지능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 지능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있다. 모든 사람의 학문적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는 것은 교육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지능에는 학문적 능력 외에도 훨씬 많은 요소가 있으며 교육제도가 개발해야 할 것도 훨씬 많다(15). 



학문적 능력이 비교적 낮은 어린이가 다른 분야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교육기관의 문을 나선다(17). 



창의성은 어떤 사람만 갖고 있거나 특정한 활동을 할 때만 발휘되는 독립된 두뇌 활동이 아니다. 창의성은 과학, 기술, 경영, 비즈니스, 음악, 기타 인간의 지능을 사용하는 모든 활동에서 발현된다. 창의성은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뭔가 구체적인 활동을 할 때 나타난다. 사람마다 자신의 지능 유형에 따라 서로 다른 창의적 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에는 음악일 수도 있고, 수학일 수도 있으며, 진흙 빚기, 소프트웨어, 영상, 또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다. 진정한 창의성은 자신의 매체를 발견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분야에서 활동할 때 나온다. 자신의 매체를 찾을 때,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창의력을 발견하고 마음껏 꽃을 피울 수 있다. 진정한 창의성은 단순히 분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매달리는 데서 나온다(19). 



모든 사람은 창의력을 갖고 있으며, 모두 다르게 가지고 있다(21). 



부모들은 교육이 자녀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목적의식과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이는 대부분의 학생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25). 


인간의 지능은 창의적이다. ... 자신의 창의적 잠재력을 자각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매체를 찾아내고 자신의 영역을 찾아내는 일이다(26). 



"독일어가 더 유용하니까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다. 차라리 독일어가 더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면 납득이 됐을 것이다. 언어감각이 뛰어나다든지, 너한테 독일어가 더 잘 맞을 거라든지 납득할 만한 이유는 얼마든 있다. 한데 독일어가 미술보다 더 유용하다는 이유는 뭔가? 물론 유용할 것이다. 특히 독일에 가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언어는 유용하지만 미술은 유용하지 않다는 건가? 아무 쓸모가 없는 건가? (34) 



모든 국가에서 미술은 유용하지 않은 과목으로 간주되어 학교 교과과정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국가 교육체계에는 미술과 음악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연극을 가르치는 나라는 몇 군데 되지 않고 무용 교육은거의 찾아볼 수 없다 ... 모든 국가 교육체계는 두 가지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언제나 '경제적' 모델과 '지적' 모델 두 가지가 있으며, 이 두 모델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세계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서구 교육체계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모델은 '산업주의'이며, 지적 모델은 '아카데미시즘'이다. 그런데 경제적 모델은 낡았고 지적 모델은 전혀 부적절하다는데 오늘날의 문제가 있다(35). 



교육제도는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능력을 재구성하고 개인의 성취와 경제적 성공에 가장 필요한 기술과 적성이 무엇인지 다시 평가해야 한다. 학문적 능력에 대한 맹신은 기능적 오류의 예다. 특정한 목적을 일반적인 목적과 혼동하는 경향이다. ... 인간의 지능에는 학문적 능력이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학문적 활동이 지능의 전부는 아니다. 미래에 대비하는 교육을 위해서, 우리는 학문적 능력에 대한 환상을 꿰뚫고 학생의 진정한 능력을 보아야 하며, 인간 능력의 여러 요소는 서로 반목하지 않고 오히려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119). 



모든 사람은 비범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 

. 지능은 다면적이다. 

. 지능은 상호작용하며 동적이다. 

. 모든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지적 능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 (121) 



재능있는 시인이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을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학문적 지능이 다른 모든 지능보다 더 우월하다는 전제가 일반적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다. 다른 능력은 덜 중요하거나 덜 대단하게 여겨져 학문적 지능만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잠재력의 폭과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양쪽을 모두 추구해야 한다.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140).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감수성은 오늘날 기업과 사회, 개인의 삶 속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개인적 특성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창의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성과 감정은 인간이 타인, 나아가 더 넓은 세상, 문화와 소통하는 통로다. 문화를 통해, 창의성은 배출되고 표현된다(207). 



창의성은 독립된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각자가 타고난 능력을 효율적으로 발현하는 방식이다(257, 역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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