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랄트 휘터(2018). 존엄하게 산다는 것. 박여명(역) (2019). 인플루엔셜

 




양장본, 작은 책 크기, 빈번히 나오는 책 한 쪽 전체 요약글 

듬성듬성한 편집을 보며 더 얇게 저렴하게 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들었다. 



편집이야 어땠든 

존엄에 대한 당위성 보다는 뇌과학 연구에 기반한 접근이 새로웠다. 


간간히 느낀 인사이트도 좋았다. 


아래는 인사이트 받은 내용


---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외부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내면의 나침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존엄이다. 사회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기 성찰이 존엄한 삶을 실현한다는 것이다(이진우, 추천사) 



아니면 우리를 인간답게 해줄, 우리를 성장하게 해줄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 우리가 아는 것들 가운데 건강을 지키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가진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데 실제 활용되는 지식은 별로 많ㅇ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13). 



인간 사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장애를 만날 것이고 그때마다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이다(17). 



이 책을 통해 내가 당신과 함께 찾고 싶은 것은 일종의 내면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형성하게 되는 내면의 나침반.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밀려드는 여러 요구로부터 자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나침반. 다른 사람에 의해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유혹과 약속으로부터, 인생에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어야 하며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태도로부터 본래 자신의 모습을 지켜줄 나침반(22). 



지금까지 내게 인생을 가르쳐주었던 다른 어른들과의 그것과 달랐으니까. 대체 무엇이 달랐을까? (31)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 하지만 이 신사는 달랐다. 그는 똑같은 동식물을 가리키며 우리가 보고 듣는 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 단지 그 아름다움만을 강조했던 것이다(32). 



나는 ... 이후 신경 생물학자가 되었다. ...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33). 



한 사람에 대한 신뢰도를 이와 같은 지표로써 평가하는 것이다. 컴퓨터는 개인이 주변을 돌아보는 방식, 고개를 드는 방식. 눈을 돌리는 방식 등을 기록하고, 평가하고, 분류한다. 그러고는 표준에서 벗어난 모든 행동을 수상히 여긴다. 물론 이때 '표준'이라는 것은 숫자로 규정되어 있다(44). 



기업들은 목적이 분명한 광고로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이는 마치 폭풍처럼 우리의 뇌를 삼켜 계속해서 물건을 사고 버리게 만든다. 채워 넣고, 또 배내기의 반복이다. 체험해볼 것을 끊임없이 제안하고, 기분 전환을 하라고끝없이 유혹한다. 넘쳐나는 정보들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은 늘 생기를 잃은 채 모니터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쏟아지는 광고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반짝이는 배너 광고와 신상품 알람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고 만다(47). 



모든 사람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지나치게 분주하며, 슬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다. 온갖 추측과 편견, 평가와 의도의 포로가 된 것이다(49).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배움이라는 활동은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탐구하고, 연구하고 추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작업인가.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활홀한 일인가.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 우리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자식을 얻는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나가봐야 좁은 운동장이 전부다. 그것도 종소리가 울려야 움직일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끝도 없이 넓은 자연 환경에서 학습하고, 그만큼이나 (53). 제한이 없는 시간 속에서 배움을 즐겼다면, 이제는 45분 단위로 시간을 자르고 나누어 공부를 한다. 한 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이 이어진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은 조용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과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학생에게는 이 설명과 질문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 무엇을, 누가, 언제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간은 이렇게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교실의 혁신을 이루어내려는 시도는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풍부한 상상력과 열정을 가진 교사와 우수한 학교, 대담한 교육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는 많은 학교가 군ㄷ대식 문화에 젖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걸러내기 위한 훈련소 같은 학교 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은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복종한다. 개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존재가 무엇을 언제 어떤 순서에 따라 배울 것인지를 이미 다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난 가장 숭고한 가치인 (54) '배움'이 의무에 지나지 않은 무엇가로 전락한 것이다. 

인류 역사는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이에 대한 답을 찾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발전해왔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누군가의 강요보다 자발적인 수행에 의해 이뤄져야 하지만, 정작 배움의 보고인 학교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활동이다. 학생들은 일제히 칠판 앞에서 선 선생님을 향해 앉아 있어야 하며, 이 일방적인 구도 속에서 학생들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다. 좁디좁은 교실 안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학교 건물 안에는 꿈 같은 것을 가질 수도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비교적 깨끗하고 그나마 덜 삭막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해야 한다(55) 



칸트는 .. '도덕적 자율성' .... 

인간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71)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너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73). 



그리고 이러한 존엄성은 침해받을 수 없으며, 쉽게 빼앗을 수 없고 인생의 부당한 요구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내면의 가치다. 인간의 존엄은 변하지 않으며, 항상 있고 영원하며, 뜻밖의 사건들이나 폭력에 무너지지도 않는다.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인간 고유의 강한 본성이자,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자 상태,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늘 뛰어넘는 그 이상의 무언가. 설령 우리가 믿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존재할 무언가. 바로 그것이 존엄인 것이다(74). 



다 알고 있었다. 저들이 나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안에는, 저들이 결코 죽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따는 것을.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결코 파되될 수 없는, 시대를 초월하여 끊이지 않는, 신성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77). 



'뇌 가소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배움이 가능한, 인간의 거대한 학습능력의 토대가 되는 뇌의 성질을 말한다(93). 



세계보건기구WHO의 2014년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700만 명이 매년 대기오염으로 사망한다(101). 



그렇다면 개인의 신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실패'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깊은 고통을 겪고 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이상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 더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설 것이다. ... 두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는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104). 



존엄하지 않는 행동은 단기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113)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존엄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115). 



중요한 경험을 꼽으라면, 단연코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얻는 경험을 들 수 있을 것이다(131). 



갓 태어난 아기의 뇌가 신경망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어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고 시범을 보여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뇌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려면 스스로 시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여러 경험들을 직접 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경험이다(138). 



이와 같은 내면의 기준 역시 개인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특정한 방향성을 가리키는 뇌의 연결 패턴이 반복적으로 활성화되면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태어난 직후부터가 아니라, 뇌가 생성되는 과정, 즉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일이다(144). 



---> 나는 학생을 수단으로 보나 목적자체인가?(158) 



이들 모두 타인으로부터 더 큰 가치를, 더 큰 주목을, 더 큰 관심을 얻고자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광고에 속았으며 존중받지 못하고 순단으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종 할인 광고에 휘둘리고, 판매대 앞에 늘어선 긴 줄에 합류하고, 광고에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상품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162).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느껴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신뢰할 만한 내면의 나침반을 발견하고, 이 나침반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사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엄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 방향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 (170) 



그 교육이 스스로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조차 심어주지 못했음을 이들이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소위 엘리트 학교, 일류 대학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이들이 경험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186) 타인을 넘어 다른 모든 생명체를 대상화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영리한 지식과 능력을 습득했을 뿐이다(187) 



아이들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강화될 수 있는 최초의 교육기관은 바로 유치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근 독에서는 유치원을 의미하는 '킨더가르텐'이 '킨더타게스슈테테'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유치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 정원'을 의미하는 킨더가르텐은 아이들이 최소한 그곳에서 놀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곳에서 성장하는 것들을 돌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킨더타게스슈테테'는 어떤가. '어린이 주간 보호소'. 단순히 아이들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188)



나아가 무엇보다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가 변화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교사들 각자가 존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기관의 교사 집단을 지원해줌으로써, 이 교사들이 자기 존엄성에 대한 분명한 관념과 의식을 갖게 된다면 더 이상 아이들을 (188) '키운다'다는 표현이 없게 될 수도 있다. ... 

이처럼 더 많은 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 각자가 가진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한 개인으로서 갖는 의미에 대한 인식을 보다 강하게 일깨워주기를 기대할 뿐이다(190). 



라틴어에서 수업, 학교, 학과를 의미하는 '스콜라'는 '여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홀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즉, 공부라는 것은 충분히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이처럼 자기 결정과 자기 발견을 위해 필요한 여유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어디에도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통해 자신에게 잠재된 끼와 재능을 찾아보거나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즐겁게 만들어갈 본성을 발휘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 아이들은 수업을 듣고, 지도를 받고, 통제당하며, 감시되고, 평가를 받는다. 어른들의 기준에 맞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당하는 것이다(191). 



존엄한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주의 깊고 신중하다는 것이다(195). 



다른 이들에 존중받고, 가치를 인정받고, 진정성 있게 대우받는다는 (208) 느낌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 이상 물건처럼 취급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209).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줄 내면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방향을 잃지 않고 유혹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살아야 더 행복하다고, 이것이 있어야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현혹하는 각종 광고나 영상, 조언이나 제안은,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태도, 다시 말해 존엄하지 않은 대우로 인식하고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주는 사람 스스로의 존엄함을 해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 존엄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높은 평가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해줄 권력이나 영향력, 재산, 상징, 지위, 자리 또한 갈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존엄함을 해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자신의 의도와 평가, 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 (210) 는 것이다(212).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 는 있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214). 



다시 움직이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연주를 하고,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자. 그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인생의 감정이 자라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도 저절로 변할 것이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움과 사랑, 존엄함이 가득한 인생이 도리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으로 타인을 만난다면, 그 전염성이 얼마나 (216) 강한지도 늒?ㅣ게 될 것이다. 나의 인생을 넘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고, 조화를 이룰 것이다(2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