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1970). 학교 없는 사회. 생각의 나무




Ivan Illich. 1970. Deschooling Society. Valentina Borremans. 박흥규(역). 2009. 학교 없는 사회. 생각의 나무


머리말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 보편적 교육은 현행 학교 형태 위에 세워진 어떤 대안 교육으로도 실현될 수 없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새로운 태도. (교실이나 침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교육적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보급, 학생의 평생에 걸친 교육자의 책임 확대 시도도 보편적 교육을 실현하게 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현행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 ‘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이처럼 교육에 대해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다른 서비스산업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게 필요한 개념을 제공하고자 한다.

옮긴이 말

대신 일리히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기능 교환이나 동료연결을 통해 배우는 것을 참된 공부라고 하지만, 그의 말처럼 학교를 당장 없앨 수 있다고 해도, 산업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런 자율적 공생의 공부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일리히는 산업적 생산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자율적 공생의 공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우리 모두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꽃다운 시절을 병적일 정도로 우울하고 서글프며 고통스럽게 학교에서 보내지 않았는지를 묻고 싶다.
--> 학교가 즐거운 곳이 정녕 될 수 없는가? 학교의 삶이 학생들에게 현재적으로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학교가 과연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우리는 그렇게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교육을 해도 대부분은 실패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국민 모두가 그런 당연한 실패를 위한 교육투자에 미쳐 있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은 철저히 국가주의적이다. 사립이라고 해도 국립과 거의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적이다. 상당정도로 국가에서 지원을 받을 뿐 아니라 학교제도나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나 입시제도나 무엇이나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다. 또한 기업의 이해관계와 직결돼 있다. 모든 학교는 기업을 비롯한 고용시장과 직결되며 대학마저도 산학연대라는 미명아래 산업계와 결탁해 있다. ... 한국에서 인간이란 평생 제도화된 서비를 받고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의 인간관을 ‘호모 서비스’라고 부를 수 있다.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자신에게 학교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업,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23-24)
--> 무엇이 실체인가? 이 책에서는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라고 한다. 듀이는 이것을 삶의 준비의 최적화라고 표현했다고 한다(임재윤의 말에 의하면) 그리고, 지식은 도구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제도가 과정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교육기회의 평등화란 사실 바람직한 것이고 동시에 실현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이를 강제적 학교화와 동일시함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동일시 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현대화된 프롤레타리아의 세속종교가 돼왔고, 과학기술시대의 빈민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실현될 수 없다. 국민국가는 학교를 채택해 모든 시민을 등급화된 졸업장을 따게 하는 계급화된 교육과정 속에 강제로 끌어들였으나, 이는 과거의 성인식의례나 성직자 계급 승진과 다르지 않다. (39-40)
--> 마치 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반드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 것처럼

공부와 정의는 학교교육에 의해 증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증명서와 결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공부와 사회적 역할 배분이 합쳐져서 학교 교육이 되고 있다. (41)
--> 이런 경우는 실제 학교 현장에서 무수히 존재한다.

학교 교육이 의존하는 두 번째 중요한 환상의 대부분의 공부가 가르침의 결과라는 것이다. 가르침이 어떤 상황의 공부에 기여할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지식의 대부분을 학교 밖에서 얻는다. 그리고 학교에서 얻는다는 것은, 몇몇 부유한 나라에서 평생을 학교 안에 갇혀 있는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는 의미에서 뿐이다.
대부분의 공부는 우연히 얻는 것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의도적 공부도 계획적으로 가르친 결과가 아니다. 보통 아이들은 자신의 국어를 우연히 배운다. 물론 그들의 부모가 관심을 가지면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우연한 사정에 의한 것이지, 연속적인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가령 외국에 있는 조부모의 집에 살았다든가, 여행을 했다든가,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탓이다. 읽기에 능한 것도 정규교육과정 이외의 활동의 결과다. 폭넓게 , 또 즐겁게 책을 읽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하도록 배운 탓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 의문을 갖게 되면 그들은 쉽게 환상을 버린다. (43)
--> 잠재적 교육과정

1962년부터 내 친구 프레이리는 여러 나라에서 추방됐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그가 공인된 교육자들이 미리 선택한 말을 중심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이 교실에 가져온 말들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53)
--> 기능적 요소만 강조하는 것이 교육인가? 학문적 체계를 효율적으로 전수해야 하는 장소가 학교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자신이 현재 관심을 갖는 일을 타인과 공유하는 동일 기회를 각자에게 부여한 망이나 서비스일 것이다. (54)

뒤르켐은 사회현실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이러한 능력은 공식적 종교의 본질 자체임을 인식했다. 그에 의하면 초자연적 것이 없는 종교와 신이 없는 종교는 있으나, 세계를 신성한 사물과 시간과 인물이 없는 것과, 그 반대인 다른 모독적인 것으로 양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뒤르켐의 관찰은 교육사회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학교는 동일한 방식에 의해 근본적으로 양분돼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강제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사회를 두 개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즉 특정한 시간대, 특정한 과정, 특정한 대우, 특정한 전문직은 ‘아카데미’하고 ‘교육적’이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구분이다. 이처럼 사회현실을 양분하는 학교의 힘에는 제한이 없다. 즉 교육은 미세속적인 것이 돼, 세속은 비교육적인 것이 되고 있다. (61)

교육적 과정이 사회의 비학교화에 의해 이익을 얻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소멸되고 있는 것은 교육 그 자체다. (62)

그러나 우리는 ‘아동’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유럽에서는 오직 최근에, 미국에서는 더욱 최근에 발달한 개념임을 잊고 있다. ... 미술가들은 아기를 어머니의 품 안에 앉긴 축소된 성인으로 묘사했다. ... 아이도 모두 그들 아버지처럼 옷을 입고, 아버지처럼 놀고, 아버지처럼 교수형에 처해졌다. 부르주아에 의해 ‘아동’이 발견된 후 이 모든 것이 변했다. (67-68)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72)
-> 아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도 많다.

학생은 그들이 배우는 모든 것을 교사에게 얻지 않는다. 총명한 아이도, 우둔한 아이도 모두 매질, 또는 바람직한 경력이라고 하는 유혹에 의해 동기 지어진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암기, 독서, 꾀에 항상 의존한다. (73)

오늘의 학교제도는 역사상 강력한 교회가 공통적으로 가졌던 3종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첫째는 사회적 신화의 저장고라는 기능이고, 둘째는 그 신화의 모순을 제도화하는 기능이며, 셋째는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기 위한 의례의 장소라고 하는 기능이다. (86)

가치의 측정이라는 신화
학교가 주입한 제도화된 가치란 수량화된 가치다. 학교는 인간의 상상력, 아니 인간 그 자체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 측정될 수 있는 세계로 청소년들을 끌어간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이란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규칙 바른 의견이나 성격의 상위한 성장으로서, 어떤 척도나 교육과정에 의해서도 측정될 수 없고, 타인의 성취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공부에서는 누구나 오로지 상상적인 노력에 있어서만 타인과 경쟁할 수 있고, 타인이 도달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을 통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중하는 공부란 측정할 수 없는 재창조를 말한다. (90)

비학교화가 갖는 혁명적 잠재력
학교는 물론, 어떤 의미에서도 현실에 대한 인간의 통찰력 형성을 목표로 하는 유일한 현대 제도가 아니다. 가정생활, 징병제도, 보건관리, 소위 직업전문주의, 각종 매스컴의 숨은 교육과정이 인간세계-시각, 언어, 수요-를 제도적으로 조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더욱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배한다. 왜냐하면 오직 학교만이 비판적 판단을 형성한다는 중요한 기능을 가졌다고 인식되고 있으며, 나아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나 타인 및 자연에 대해 공부하는 경우, 미리 포장된 과정에 의존해 그렇게 하고자 학교가 노력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우리와 너무 가깝게 접촉하고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학교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103)

우리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제도유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유형 모두 현존 제도에서 그 보기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거의 현대를 정의할 정도로 특징적인 것이다. 이 압도적인 유형을 나는 조작적 제도로 부르고자 한다. 반면 다른 유형 역시 존재하기는 하지만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비교적 소극적이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나는 더욱 바람직한 미래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나는 ‘공생적’ 제도라고 부르고 제도 스팩트럼의 왼쪽에 두고자 한다. 이는 양 극단 사이에 여러 제도가 있음을 보여주고, 역사적으로 생성된 제도들이 사회활동을 촉진시키는 것으로부터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이행함에 따라 색깔이 변화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114-115)

학교도 마찬가지로 공부는 교육과정에 따른 수업의 결과라고 하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고속도로는 기동성에 대한 욕망과 필요성을 자가용 수요로 전환시킨 결과다. 마찬가지로 학교 자체는 성장과 공부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수업에 대한 수요로 전환시킨 것이다. 타인에 의해 제도된 인간성숙에 대한 수요는, 제조된 상품에 대한 수요보다도 자발적인 활동의욕을 더욱 더 상실하게 만든다. 학교는 고속도로나 자동차보다도 더 오른쪽에 있을 뿐 아니라, 총체적 보호수용자가 있는 제도 스펙트럼의 극단에 가깝다. 심지어 무기 제조업자들도 육체만을 죽인다. 반면 학교는 사람들에게 그 고유한 성장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일종의 정신적 자살로 이끌고 있다. (126)

우리의 현 교육제도는 교사의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관련구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공부와 타인의 공부에 기여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44)


옮긴이 해설

누구나 본래 스스로 공부하는 자율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잃고, 학교에서 타율적으로 배우는 것만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로 바뀐 것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자는 그 주장을 달리 본 적이 없다. ... 스스로 걷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가용이나 병원에 의해 타율화됐듯이 우리의 모든 고유한 능력이 타율돼 사회자체를 자율적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220).

여기서 민중의 자율이란 협소한 의미의 개인의 자율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공생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3-264)

이에 반해 ‘학교 없는 사회’는 인간이 무엇을 배우고 싶을 때 그것을 나름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을 모색하는 사회이다. 곧 자신의 목표와 관련된 일을 더욱 쉽고 빠르게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그는 사회화되지도 않고, 훌륭한 시민이나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지도 않고 배우고 싶은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리히의 친구였던 교육학자 존 홀트가 그의 <교육이 아니라>와 관련해 한 다음 이야기는 인상 깊다.

<<나 자신 납득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정의란 없다. ‘교육이 아니라’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특수한 장소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면서 행해지도록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는 주변 세계와의 교류에 의해 그 전보다 사물을 알고 현명하게 되며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능력이나 기능도 몸에 익혀 자각적으로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인생에는 큰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매우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가고 일하며 놀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단절은 없다. 그 전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다면 ‘교육’의 정의에 알맞은 말을 하나 고르기란 불가능 하다.>> (348-349) <<인용문>>은 A. Falbel, 1993, Learning? Yes of course. Education? No thanks, Growing without schooling, 92, pp. 13-14. 있다고 함.
-> 교육은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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