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2000). 액체근대. 강



지그문트 바우만(2000). 액체근대. 강
유체가 지닌 이 모든 특징들은 결국, 단순하게 말하자면 고체와 달리 액체는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유체는 이른바,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는다. (중략) 따라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 (중략) 유체를 설명할 때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는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다. 유체에 대한 설명은 하단에 날짜가 있어야 하는 사진들과도 같다.
(중략)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우리는 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의 속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유동성’이나 ‘액체성’이 적합한 은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8-9)
-> 근대를 유체로 비유하여 설명하려는 시도
오늘날 점점 더 공급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순응하고 안정적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인도해줄 수 있는 그러한 행동들, 규약들, 규칙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동시대인들이 자신들의 상상력과 결의로만 인도받고 처음부터 마음대로 삶의 양식을 자유롭게 건설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 건설 자재들과 설계 청사진을 사회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것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현재 우리가 사전 할당된 ‘준거 집단들’의 시대로부터 ‘보편적 비교’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이며, 우리 시대에 개인의 자기 건설적인 노력의 목적지가 그 특유의 치유 불가능한 미결정 상태라는 것, 그러한 노력이 유일하게 진정한 끝에, 즉 그 개인의 삶의 끝에 도달하기 전에는 미리 주어지지도 않고, 수많은 심오한 변화를 겪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행동 유형들과 구성들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음은 물론 ‘주어지지도’않는다. 이것들은 그저 너무 많이 널려 있으며 서로 부딪히고 서로 간의 계율이 모순을 이루고 있어서 우리를 다그치거나 회유할 억제력을 잃고 말았다. (중략) 액화하는 힘은 ‘체제’를 ‘사회’로, ‘정치’를 ‘생활정책들’로 바꾸고, 사회적 공존의 ‘거시적’인 차원을 ‘미시적’인 차원으로 내렸다. (15-16)
-> 행동유형들과 구성들이 ‘자명하다’는 것은 자율성을 옹호하는 것 같고, ‘주어지는’것은 공동체성을 옹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바우만의 지적처럼 어느 한 주의를 교육에 강조하는 것은 ‘근대의 근대화’(14)를 표현하는 ‘이차 근대’(울리히 벡, 14)시대에 근거를 잃어가는 주장 같다.
‘유동적 근대’의 도래가 인간 조건에 초래한 심오한 변화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체제의 구조가 지닌 원력성과 접근 불가능성은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순간적 생활정치 무대와 쌍을 이루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그 서사를 형성해 주던 낡은 개념들을 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좀비들처럼, 낡은 개념들은 오늘날 죽어 있는 동시에 살아 있다. 실제적 질문은 그것들의 부활이 새로운 형상을 통한 것이든 다른 육체를 통한 것이든 간에, 실행 가능한가이다. 혹은 실행 가능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점잖고 효율적으로 매장시키는가이다. 이 책은 그러한 요청에 답하고 있다.
-> 자율성과 공동체성 같은 개념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낡은 개념인가? 아니면 현재도 실제적으로 살아 있는 vivid한 개념인가?
탈지리적(20)
탈원형감옥식(21)
유동적 근대 단계에서는 다수의 정착한 사람들이 유목적이고 탈영토적인 엘리트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24)
즉시성의 시대(26)
-> 바우만이 고안한 ‘액체근대’라는 명칭은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버리는 근대의 징후를 설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체 근대시대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경계가 명확했다면, 이제는 그 경계가 녹아져서 모호해진 시대가 올 것임을 시사한다. 아니 이미 우리 생활의 상식에서 무지불식간에 왔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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