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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모(2006). 학문의 조건. 파주: 나남출판
나는 모든 일에서 자율(自律)은 사기(士氣)의 근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국교육 전반의 질 저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사·교수의 자율상실에 의한 사기저하에 비롯한다고 믿는다. 누군가 ‘오늘날 한국 대학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교육부다’라고 힐난했다. 그 책임의 전부는 아니라도 그 대부분이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도 자기가 할 수 있고 또 응당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주 ‘내가 할게!’라고 주장한다. ‘안돼!’ 하면 시무룩해진다. 하물며 자기만이 자기 일의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교사·교수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퍼부으면 일에 손이 잡히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
물론 자율은 문자 그대로 마음대로 라는 방종한 전횡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자율에는 책이미 수반한다. 대학과 교수 자신도 필요하면 언제라도 스스로의 행적을 공개해도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교수 자율의 책임도 누군가는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수라고 완전 치외법권적일 수는 없다. 교육부는 그 책임을 묻고 감독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자율·자치라는 보호벽 속에서 자행되기 쉬운 불법·비행은 감독해야 한다. 그러나 자율을 인용(認容)하고 그 책임을 감독하는 것과 애당초 자율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율이 허용되지 않는 타율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무책임·무도덕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이치를 이 나라의 정치가, 행정가는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노예는 그의 행위에 자유·자율이 없으므로 동시에 그 책임도 도덕성도 따질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일병사들은 타율적 명 (57)
령에 따라 눈 깜짝 안하고 무고한 유태인 수백만 명을 가스실에 몰아 넣어 죽였다. 크고 작은 타율상황은 그만큼의 크고 작은 무책임·무도덕 상태를 만들어 낸다.
관료권위주의는 교육개선·복지증진 등 어떠 간결한 선의(善意)의 염원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옛왕조의 어진 임금님은 백성을 적자(赤子), 즉 갓난아이처럼 생각하고 두루 자상하게 잘 돌보는 임금이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민주국가의 국민은 ‘적자’가 아니다. 인권을 가지고 있고 의식하고도 있으며 자율능력도 있는 국민이다. 그리고 인권의 중핵은 자율이다. 아이들도 부모가 일일이 너무 자상하게 돌보는 과보호하에서는 잘 자라나지 못한다. 국민도 교사도 아이도 도리어 적절하게 ‘덜 돌보고’, 덜 간섭하는 것이 ‘잘 돌보는’ 길이다.
한국 대학을 덮고 있는 정부 타율의 짙은 구름, 짙은 가위는 기필코 얼른 걷혀져야 한다. 그 이전에는 한국 대학 소생의 길은 없다. (58)
-> 교사는 노예인가? 오히려 교사 자체가 노예근성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자율이 없으므로 양식과 관행을 더 찾는다. 그리고 나서 책임은지지 않으려 한다.
-> 인권의 중핵은 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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