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2007)_입시공화국의 종말. 인물과 사상사



김덕영_2007_입시공화국의 종말_인물과 사상사
독일에서 공부한 방식대로 글을 썼다. 독일에선 정답이 없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인상 깊다. 신문, 심지어 인터넷 기사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이 책을 읽고 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사람은 연세대를 나왔는데, 서울대를 나왔다면 이 글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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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치르는 모든 시험은 주어진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이다. 초등학교부터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는 고시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주관식 시험의 경우도 말이 주관식이지 객관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현과 과정에는 그렇게 명쾌한 정답이 존재하는가? 무조건 정답을 골라야 하는 시험을 통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가? (머리말, 7쪽)

-> 우리는 다 알고 있고 지배층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바꾸지 않는가? (20100918)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와 가정 그리고 학원으로 이어지는 ‘담 없는 감옥’, 혹은 ‘보이지 않은 감옥에 갇힌 채 식사와 짧은 수면 그리고 이동하는 시간을 빼고는 쉼 없이 공부, 공부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답을 찾는 훈련이다. 누군가에 의해, 즉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에 의해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는 훈련 또는 틀리지 않는 훈련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결코 주체적으로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정답을 찾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제시한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나에게 주어진 문제에서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시험 문제를 앞에 두고 깊이 생각하면 자꾸 혼란스러워진다. 시험을 잘 치르려면 거의 반사적이고 기계적으로 정답을 고르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보아야 한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야 한다. (36)

오답 노트는 약점 노트이다. ... 누군가 약점을 지녔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의 자아나 인격에 결함이 있거나, 그가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사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 공동체성이 부족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시는 틀리지 않기 위해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 외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다시는 틀리지 않기 위해 오답 노트, 즉 약점 노트를 만드는 교육과 입시에서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아와 그의 자유로운 사유 능력 그리고 이에 기초하는 공동체적 가치는 배제된다. (38)

<주어진 정답만 찾아라> 한국에서는 보다 더 정답을 잘 고르는 학생들이 대학의 서열 피라미드에서 윗부분을 차지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즉 누구보다도 중 고등학교에서, 아니 이미 초등학교부터 비근대적인, 아니 반근대적인 몰주체화 과정과 몰개체화 과정, 다시 말해 개인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부정하고 말살시키는 과정을 잘 소화해낸 학생들을 요구한다. (41-42)

그러나 모든 것이 경제적 발전에 초점을 맞추던 성장 단계와 달리 고도의 사회적 분화와 기능적 분업이 이루어지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유순하고 순종적인 인간 유형에 의한 발전과 성장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던 교육이 어느덧 지속적인 근대화의 ‘덫’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덫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교육이 주체적 인격체로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행위 능력을 소유한 개인들을 길러내는 데에 있다. 즉 이제 교육은 주체적 자아의 형성․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객체적 자아에서 주체적 자아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46)
-> 자율성 필요성!!

내가 보기에 고교 평준화 정책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사회철학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칙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최소한의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녀의 대학 입시를 위해 투자하는 부모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은 막을 길이 없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사회철학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고교 평준화가 아니라 대학 평준화이다. 즉 누구든지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를 주고, 대학에서 경쟁을 통해 나타난 불평등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구조로 가야 하는 것이다. (94)

내가 보기에 내신 그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즉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학업 성취도에 따라서 줄을 세운다는 발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객관화하고 계량화하고 그 결과에 근거해 상호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여기서 인간은 객체화의 대상이된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인격은 부정되고 무화된다. 남는 것은 산술적 논리일 뿐이다.
나의 학업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다. 물론 비교될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른바 ‘찍기’라고 불리는 객관식 시험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시험을 치르는 개인의 주체적인 사고와 행위는 철저히 배제된다. 마치 기계가 입력된 정보와 지식을 얼마나 잘 저장하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명령에 따라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저장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가를 측정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109)

<최소한의 근대성과 합리성을 갖춰라> 창의성과 개체성이 실종된 교육은 이미 더 이상 근대적인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을 획일적이고 무특징적인 존재로 규율하고 훈육하는 전체주의 국가나 파쇼 국가가 선택하는 교육의 이상이자 목표이다. 이른바 국가 경쟁력도 다름 아닌 창의성과 개체성이 근거한다. (129)

초․중․고등학교는 단순히 대학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간 단계나 통과점이 아니다. 양자는 상호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마치 유아기나 청소년기가 단순히 성인기로 가는 과도기가 아니라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단계이자 과정이듯이 말이다. 만약에 전자가 단순히 후자의 과도기라면 어린 시절의 놀이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 시간에 공부를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양자가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서 나름대로 고유한 의미와 기능을 지닌다면 어린 시절의 놀이는 필요하다. 이 경우네 어린 시절은 공부를 하는 시기가 아니라 놀이를 하는 시기이다. (132)

짐멜이 유행을 모방과 차별화의 관계 속에서 접근하는 철학적 근거-이를 테면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결정하는 커다란 두 조류인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170)
->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와의 관련성.

한국의 교육은 ‘나’, 즉 자아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유와 행위를 가르치지 않고, ‘나’와 ‘너’, 즉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아는 타자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위해 왜소화하고 부정하며 무화시켜야 할 그 무엇으로 가르친다. 개인은 언제나 초개인적 사회 집단과 국가에 자리를 주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집단주의와 국가주의가 한국의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념이다. 이러한 집단주의적․국가주의적 이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개인에게는 그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 요구될 뿐이다. (209)
나, 즉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는 타자로부터 거리를 두는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둘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마치 남처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며 나 자신을 객체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개인이 두 가지 정신적 능력을 겸비할 때 비로소 그는 자의식을 소유한 존재라고 표현한다. (210)
나는 지적인 홀로서기를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미세한 조직을 파헤치고 관찰하며 기록하는, 그리고 이를 통해서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생명 과학자의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부하고 다시 결합하는 방식 이외에는 달리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 지금도 내가 본 책에는 단 몇 줄짜리 명제를 수없이 파헤치고, 자르고, 연결하고 종합하며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처절한 시도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무엇을 안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책이나 논문을 읽으면 지식과 정보는 언제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22)

아무튼 탁월한 조망과 구도에도 불구하고 논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설명과 논증이 부족하다는 전체적인 평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자신의 견해가 필요한 부분에 남의 글을 인용하고, 남의 글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논의가 없이 넘어갔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223)

한국 대학 사회는 철저하게 ‘그레셤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문화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 유명한 법칙 말이다. (236)
-> 학회에서도 나온 이 법칙은 과연 무엇인가?
=> 인터넷검색: 원래의 의미는 시장에 좋은 품질의 화폐와 나쁜 품질의 화폐가 동시에 존할 때 품질이 떨어지는 화폐만 남고 좋은 화폐는 사라진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하면 무역시 금이나 은 함유량이 적은 화폐가 유통되어 결과적으로 국가가 금을 많이 보유하게 되어 국가가 부유해진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일반적으로 확대되어,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품질이 좋은 상품은 시장에서 사라지고 품질이 낮은 상품만 남게 된다는 의미, 자질이 높은 사람은 조직에서 사라지고 자질이 낮은 사람들만 남게 된다는 의미 등으로도 활용된다.

<정답 찾기는 그만하자> 집합론의 창시자인 독일의 위대한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르의 말이 떠오른다. “수학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 수학은 주어진 조건에서 모순이 없다면 족하다.”


  사유의 자율성, 이것이야말로 성숙하고 자유로운 근대적 인간의 정신세계의 기본적인 특징이자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문화적 근대화의 첫걸음이다. 한국 사회도 이제 이 첫걸음을 떼야 한다. 정답을 찾는 시험을 폐기함으로써!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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