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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란(2009). 내가 교사가 돼도 되나?. 이매진
고등학교 때였다. 논술 시험을 준비하려고 프랑스 대입 시험에 나온 문제와 우수 답변을 모아 놓은 책을 한 권 샀다. 책을 펴고 차례를 보는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죽음은 인간에게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가는가?’,‘기술이 인간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같은 철학적인 문제가 시험에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니체와 칸트, 루소와 마르크스 같은 학자들의 말이 곳곳에 인용된 답변을 보면서 이것이 정말 내 또래의 학생들이 쓴 것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논리를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왜 나는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인가? 분명 나도 그 아이들과 똑같이 삶과 죽음, 세상을 마주한 인간인데....... 그리고 12년이라는 교육과정 속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치열하게 노력했는데.......
그것은 내가 거치온 대한민국의 공교육 체계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교육은 모든 학문의 시작인 ‘왜?’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것보다 여러 교과의 탐구 결과를 외우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물론 그 덕분에 국어, 영어, 수학, 국사, 지리, 과학 등 다양한 교과 지식을 요령 있게 외우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지식을 알게 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런 지식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다. (19)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지금도 많은 학생들은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흥미도 호기심도 느끼지 못한 채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정해진 답을 선택하지 못하면 틀렸다고 판단하는 지금의 교육과정은 어떤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자기 시각에 따라 논리를 펼치는 것도 못 하게 한다. 백 가지 색깔을 가진 백 명의 학생이 아니라 한 가지 색깔을 가진 백 명의 학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일차원적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돼서는 안 된다. 인간과 세상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학생들에게 선물로 줘야 한다. 참된 교육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려고 이루려고 하는 에너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0)
-> ‘결’이야기.. 각자의 색을 갖게 해야..
학교교육으로 내가 얻은 것은 ‘보이는 공부를 하는 법’이며, 잃은 것은 ‘실질적으로 공부하는 법’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즉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공부가 ‘보이는 공부’라면 ‘실질적인 공부’는 스스로 절실히 원해서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중략).. 보이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길 바란 것 같았다. (21)
그러나 내가 받은 교육을 돌아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교과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교육은 한 개인의 역사고 그 자체다. 내가 받은 잠재적 교육과정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듯이 교사로서 내가 미래의 학생들에게 할 교육이 그 아이들을 또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지 모른다. 한 사람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먼저 사람을 이해하고, 올곧고 열린 마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32)
오늘날의 교육은 어떠한가? 어린이들이 찾아야 하는 ‘삶의 자리’와 ‘존재의 어떠함’은 고려하지 않고 어른들의 생각과 욕심만 앞선 채 강제로 끌고 가고 있지 않은가? (중략) 어른들은 아이들 스스로 알 수 있게 돕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는 것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한다. (33)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는 누구보다도 인간 안에 잠재된 무한한 학습 능력을 인정한다. 따라서 섣부르게 가르치고 주입하려는 어른들의 행위가 오히려 아이들의 천재적인 학습 능력을 망칠 수 있고 배우려고 하는 의욕과 즐거움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무지한 스승>>, 궁리, 2008). (33)
나는 교육을 통해서 좀더 이상적인 삶을 살길 원한다. 한번 주어진 삶을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게 살려고 교육받고 싶다. (37) (중략)
요즘 내 주변에는 자기 꿈하고는 별개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 많다. 공무원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인 생활이다. 요리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요즘 교육은 코미디다. 교육이 인생의 가치와개인의 고유한 방향성을 찾아 그것을 개발하고 실현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무의미한 삶을 부추기고 있다. 나는 내가 왜 교육받고 있는지 모른다. 확실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나는 길을 잃은 것인가? (38)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2007. 김성호 역. <<삶으로 배우고 사랑으로 가르치라>>. 씨알평화 : 비노바 바베는 간디의 제자이며 동료로서 성자로 존경받는 인도의 사상가 .
비노바 바베는 교육의 목적이 잡다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한 것을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게 훈련하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성장과 배움을 위해서 홀로 설 수 있는 힘(-> 자율성이네?)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첫째 목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사랑과 평화의 힘 강화, ...셋째, 실천을 통한 앎. ...넷째, 올바르게 사는 방법 제시 ... 비노바 바베는 교육이 곧 삶이 되어야 하며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8-49)
(-> 초등학생일지라도 스스로의 교육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다 허울뿐이고 참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예고나 외고를 다닌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나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스물네 살이 된 지금까지 내 자신을 찾으려고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내 생각과 의지가 없는 삶을 살아오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와 친구들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교육열은 그런 점에서 무척 비관적이다. 내가 그 결과물이므로 누구보다도 잘 말할 수 있다. (75)
(-> 참된 삶, 자신을 찾게 해주는 교육.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있는 삶을 살게)
수업은 수업 전에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질문 거리를 생각해보고 제시된 주제로 글을 쓰고, 이것을 바탕으로 조별로 둘러 앉아 대화와 토론을 한다. 매주 한 번 있는 이 수업을 위해서 나는 많은 생각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준비한 만큼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대화와 토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해야 하고, 동료들의 피드백이 그 자리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저마다 타묵하면서 자기 생각을 완성해간다. 이렇게 하려고 나는 어느 때보다도 자주 도서관에 갔다. 그렇게 혼자, 그리고 함께 고민하면서 한 공부는 신기하게도 오래 남는다.
이 수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Beating of heart'다. 다른 수업은 듣는 동안 머리만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번 수업처럼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없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수업 시간, 그리고 진동하는 내 마음. 나는 이런 수업이 좋다. (94)
(-> 마음이 움직이는 수업-. !)
... 상부권력 때문에 위축된 교사의 자율성, 거기서 비롯된 무력감, 수평적 소통 부재에서 오는 답답함은 많은 교사들이 하소연하는 일반적인 어려움들이다. (중략) 이런 문제에 재대로 답하려면 교사 개인의 능력을 탓하기에 앞서 학교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다. (106)
(-> 왜 우리나라는 자유를 주지 않나?)
살다보면 학습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자기 평가... (119)
독재자와 참된 지도자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독재는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반대 세력을 무시하고 무슨 수를 쓰든지 밀고 나가는 것이라면, 올바른 지도력은 그 집단의 목표나 올바른 가치를 위해 일을 결정하며,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게 설득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136).
이 두 가지 일은 20대 중반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동시에 겪은 일이다. 그 전까지는 배우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고, 살아가는 것은 그 돈을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돈을 벌다 보니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존중감’이었다. 자신이 존중받고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은, 삶을 주도하고 그것 때문에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 자아존중감은 어느날 갑자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잘 알려면 평생 끊임없이 나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존중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 줄 수 있다.
원래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지만 그것을 마음 깊은 곳에 미뤄두고 다른 공부를 해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궁극적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학사-석사-박사가 목적이 아니라 평생 보고 듣는 것으로 더 온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적당한 직장을 찾아 적당한 일을 하다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인간이 평생 계속 배워야 하는 이유는 나를 더 잘 알고, 그렇게 쌓인 지적 능력을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 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입시에 찌들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단지 돈을 많이 벌 직업을 가지려고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학생들에게 교육은 연봉을 올리고 스카우트를 받기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학생들은 노후는 물질적으로 (181) 풍요롭겠지만 과연 삶과 자연에 대해 어떤 가치를 두며 살게 될지 걱정이다. 나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정부 보조로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182)
시험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상략)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학습은 마치 고등학교 3학년까지만 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 같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목표 지점으로 달리라고 가르치고 그 경기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얘기한다. 시험이 끝난 뒤의 삶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되고, 그 삶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버텨내고 견대내야 하는지 아무도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고 방향도 모른 채 고속열차를 타고 끊임없이 달리는 인생을 산다. (183)
교사가 되려면 교사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교육은 인간에 관한 일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려고 하는지 등에 대해 정답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참된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존 테일러 개토는 ‘교사는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치니는 것’이라고 했다. 개토는 ‘우리가 누구인지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완전함으로 나아갑니다. 제 자신이 완전해지고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완전해집니다. .. 교사의 진정성... (223)
존테일러 개토: 뉴욕 30여년 동안 교사 재직. 바보만들기2005, 교실의 고백2006.
내가 자율성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잊고 있던 ‘나’를 찾는 데 있다. 그동안 내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 과연 있었는지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 나와 당당히 자기 의사를 밝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유치원 때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나한테도 내 생각이 있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즐겁고 바라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모른 것이 두루뭉술한 상태다.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를 찾다보니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 숨겨진 ‘암묵적인 폭력’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구조의 힘에 따라 학생들의 다양성은 정해진 틀로 나뉘고, 학생 개개인의 독특함과 개성도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려 나가고 묻히게 된 것이 아닐까?
(-> 초등학교때에는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학생이 많다. 유치원이하 아이들도 그렇고, 신기하게 중/고/대가 되면서 자기가 없어져 간다..)
자율성의 정의를 찾아보면 ‘자기 스스로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성질이나 특성’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강제학습, 두발 자유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단지 비행으로 여기는 학교, 정해진 교육과정, 정해진 등교 시간, 정해진 교실, 정해진 교사 등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조건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학교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디에도 그 자리는 없다. (->논문필요성에 기술!!!!)
7차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이 심화과정 수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 단지 점수 차이에 따라 나뉘는 반이지 무엇이 심화 과정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수학에서 심화 과정으로 미분, 적분만 가르쳤다. 그리고 사회탐구, 과학탐구 영역에서 가르친 것도 대학 진학에 유리한 내용일뿐 심화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대학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이다. 대학교 입시 발표가 나면 고등학교들은 일제히 입시 정보에 맞춰 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학생들은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는커녕 특정한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과 마주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문과과 이과로 나뉘는데,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우스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여자 고등학교라서 문과 지원자가 훨씬 많았다. 이과는 한 반에 30명 정도 배정이 된 반면 문과는 한반에 40명 정도가 배정되었다. 선생님들은 문과 반을 늘리는 것이 어려우니까 문과 반 중 일부학생은 이과로 가라고 명령했다. 결국 어떤 학생은 선생님들의 강요 아닌 강요에 못 이겨 자기 뜻하고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 학생들은 학업 성취도가 좋은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 뒤 어찌 되었겠는가?
나는 문과와 이과로 구분하는 체제에 반대한다. 학생들의 선택권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과에서 과학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나 이과에서 국사나 사회 관련 과목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을 무시한 채 학교는 학생들의 진로와 적성을 두 가지 길로 나눠서 한정 짓는다.
만일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싶다면 현재의 교육과정 체제를 바꿔야 할 것이다. 문과와 이과 구분을 없애고,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과는 교과부 방침에 따르다보면 고3때 수학2와 미분, 적분을 동시에 배워야 한다. 이것은 학생들과 학교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계획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중략)
요즘 학생들은 꿈이 없다. 아니 꿈이 뭔지 아예 모르겠다고 한다. 그저 지금은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좋은 상급 학교, 좋은 대학, 좋은 학과, 좋은 직장이 우리들의 생각을 규정하고 있다.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좋은 그 무엇을 위해서 우리들은 맹목적으로 무한 경쟁을 벌여 왔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대한 의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무엇이 조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략) (231-234)
따라서 대학에서 보장하는 자율성과 전문성을 고등학교 과정까지 확대시켜야 한다... (266)
성적에 매이지 말고 즐기며 공부하세요. 자기 성장을 위해서 하세요. 점수, 그거 허구에요. A+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진짜 실력이 제 몸에 배도록 노력하세요. 그래야 훗날 후회가 없을 겁니다. (292)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하는 척하는 바보가 되지 말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져라. 아무것도 두려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라. 무엇이 됐든 용기를 내어 도전하라. 배움이 자기 삶의 동력이 되게 하라. 이것은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라. (292)
가르친다는 것은 한마디로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자라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힘으로 자란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교사와 학생은 모두 자유인이 된다. 자유롭게 하는 교육이야말로 참된 교육이 아니겠는가!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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