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타 살레츨(2010). 박광호 역(2014).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후마니타스.


저자의 ted 강연


내 요약 

1. 사람들은 자신의 주이상스(언어 문화를 배우기 이전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선택하기 원한다.
2. 사람들의 선택은 대타자Big Other(언어 사회 문화; 타인 눈, 사회적 의미)의 영향을 받는다. 
3. 사람들은 선택할 수 있어서 주체적이라고 느끼지만, 대타자를 넘어선 혹은 사회 구조를 넘어선 선택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독재성이다. 


선택은 오늘날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그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계속해서 찾다 보면 완벽한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택에는 상실이 수반되기 마련이고 - 인생에서 한 방향을 선택하면 또 다른 가능성은 잃게 된다 - 또 선택은 생각보다 예측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8).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삶에서는 부족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오늘날의 소비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또 최종 심급에서는 사회 변화까지 가로막는다. 우리는 너무 많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또 자신을 개인적인 기획 -나 자신의 삶-의 전적인 주인으로 여기면서 정작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들에 대해서는 잊고 만다(12).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예측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순응하고 싶지 않았던 원인들에 이끌려 현재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랍니다(14).

개인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시키면서 쾌락의 경계를 끝없이 넓힐 수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경계가 없어 보이는 사회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보통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 무제한적 소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소모해 버리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자해, 거식증, 폭식증과 더불어 각종 중독증이 이를 가장 잘 보여 준다(20).

선택이 개인적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궁극의 수단으로 찬양될 때, 사회적 비판의 여지는 거의 사라지고 만다. 개인적 선택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는 선택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며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31).

<정리 물음>
이 물품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것 때문에 나는 집을 더욱 사랑하는가?
내가 꿈꾸는 삶에 이것이 있는가? (61).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는 소비자는 소비를 하고도 곤란한 결과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즉,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63).

부채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는 이런 태도는 금융 위기로 이어진,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던 우리 소비의 기초였다. 요컨대 지금 사고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신용카드를 정리하고 그 최후의 심판을 연기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대형 금융기관들은 결제일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환상을 대규모로 조장했다. 소비자에게 빚에 대한 이자를 갚기만 하라 권하던 시기에는, 프랑스 정신분석가 옥타브 마노니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라고 부른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이런 자기기만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깨닫는 시기를 훨씬 지나서도 계속 산타클로스에 관한 환상을 품게끔 하는 자기기만과 비슷하다. 소비자는 빚이 있음을 알지만 다 괜찮을 거고 아무튼 그럭저럭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환영을 유지하고자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65).

선택이 더 큰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자기 확신에 빠져들수록 실제로 만족감을 느낄 가능성은 줄어들었던 것이다(68).

누구나 마음먹고 전념만 한다면 유명하고 화려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버리고 실현 불가능한 환상을 쫓도록 만들었다(80).

전 국민 의료보험을 반대하는 이들이 줄곧 민영화를 조장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보험을 선택할 수 있지만,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삶에 상당 수준의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92).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이 선택을 내리는 방식은 타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 지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택이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에도 영향을 받는다. 라캉주의 정신분석가들은 언어, 제도, 문화 -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모든 것 -를 명시하고자 ‘대타자Big Other'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이 같은 [사회적]공간은 우리 삶 전체에 걸쳐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는 그것을 상당히 일관적이고 상징으로 가득 찬 무엇으로 상상하면서 그것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인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다.
대타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우리는 그것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불평하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온갖 환상을 꾸며 낸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차라리 누가 대신 내려 줬으면 하는 선택(이를 테면 전기회사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불평하면서도, 사람들은 흔히 통제하고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는 불안, 혹은 기업과 같은 더 큰 실체가 이미 모든 결정을 내렸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직면한다. 바꿔말하자면 사람들은 대타자에 대해 염려한다. 라캉주의자들은 대타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상징적 질서는 일관적이지 않고 그 틈gap이 뚜렷하기 때문이다(93).

‘자연적’행동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시원적 주이상스jouissance, 즉 행복에 겨운 언어 이전의 향락enjoyment이 결여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돌연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생명 활동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우리의 안녕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욕망과 충동들도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접하는 언어와 문화는 이내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이 될 뿐만 아니라 애초에는 자연적인 충동이었던 것들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공간이 된다(100).

개인을 특징짓는 결여가 어떤 본질적인 주이상스의 상실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결여는 사실 주체성의 초석이다. 개인은 결여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상실된 향락을 구현하고 그 결여를 보상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되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여를 특징으로 한다는 그 사실이 바로 사람들을 계속 욕망하게끔 하는 엔진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족을 주리라고 희망하는 것 - 예컨대 파트너, 아이, 혹은 단순한 소비재 -을 끊없이 추구한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가 선택한 것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남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주이상스를 경험하고 있다고 느끼고 결국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끼게 된다(101).

뒤푸르는 더 나아가 주체는 늘 대타자에 종속된 주체이며, 대타자는 과거에 일종의 대주체big Subject의 형태로 -신이나 왕에서부터 자연원리와 ‘인민’에 이르기까지 - 다양한 형태를 취해 왔다고 지적한다. 서구 역사가 전개되어 오면서 개별주체와 이 대주체의 차이는 작아졌다. 뒤푸르는 계몽주의 시대 초반에 개인이 자신의 준거를 바로 자신에게서 찾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이때부터 주체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데 더는 외부의 존재Being - 신, 나라, 혈통 -를 참조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고유의 기원이 되었다. 근대성과 더불어 다양한 대주체들이 출현했다. 이는 교회 권력의 쇠퇴와 엄청난 과학적 진보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간 주체는 점점 더 그 자신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었다(105).

<평범한 정신병/ 무색의 정신병>
화려한 인생 이력을 지닌 한 남성 환자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남성은 젊었을 때 유명한 기업에서 일하는 변호사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변호사로서 성공했다. 이후에는 거리에서 한 선원을 만났고 그를 따라 상선을 탔다. 또 우연히 사업가를 만나 이내 본인도 사업가가 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슈레버와는 다르게 이 남성은 특정한 사건으로 촉발되는 망상적 형태의 정신병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정신병은 일련의 성공적인 동일시였다. 그는 단지 타인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런 강력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에 대한 눈에 띄는 불안이나 의심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서 말이다. 모든 게 다 성공적이었는데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를 느낀 이유가 무엇이냐고 담당 정신분석가가 묻자 그는 웬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정신분석을 받는 와중에도 그는 매우 순종적이고 착실한 환자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 또다시 가장 친밀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108).

이 같이 인터넷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관계들을, 이 사이버 연애 시장에서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상된 ‘가치’를 통해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 친밀한 관계들을 도구화한다(126).

요컨대 이상형 목록을 정해 데이트를 하고 잠재적인 파트너가 나와 어울리지는 성급히 평가해 버린다면,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는 찾을 수 없었을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127).

우리에게 여전히 숭고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사랑과 욕망보다는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나르시시스적인 문화에 빠져 있는 것일까? 후자는 타인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와는 관련이 적고 어떤 상실된 주이상스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더 가깝다. 이는 바로 일회적 만남이 끝날 때 흔히 외로움이 음습하는 이유다(131).
사회의 금지에는 늘 어떤 불만족이 따라다닐 것이다. 우리는 만족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게 있을 때 흔히 불만을 터뜨린다. 예컨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 데 형편이 안 될 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메아리가 없을 때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만족을 방해하는 것이 사라져 바라던 것을 얻게 될 때 이것을 원했던 게 결코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 다른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다. 이런 불만족의 표출은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의 본질이다(135).

비록 ... 선택이 무의식적인 경우가 보통이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지들이 있음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권력을 포기하지 못한다(165).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는 행위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과거를 재해석하는 행위이다(166).

21세기를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에게 제시되는 선택은 아주 흡사해 보이는 두 길 사이의 선택이다. 그런데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별 차이가 없는 선택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겉보기에 임의적인 결정으로 보이는 선택에 달려 있다. 비록 나중에는 사실상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담하게 선택을 내렸다고 이야기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기억을 보정하고 선별해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에는 무심코 내렸을 선택인데, 영웅적으로 또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신비한 매력을 부여한다. 우리는 과거에 이렇게도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일이나 과거의 일과 관련한 불행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절망적인 것의 근원은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했던 간에 오직 결과는 지루함과 불만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있다(168-169).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분석하면서, 주인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목숨을 건다고 지적한다. 노예는 확실한 미래를 보장 받고자 인정을 단념한다. 선택을 피하는 사람은 노예처럼 행동한다. 고통과 비참에 빠져 있는 현실을 감수하면서조차 확실성에 매달리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견디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의 우연성을 견디는 것보다 힘들 수 있다(171).

자크 라캉은 주체성의 형성(그는 ‘주체화’subjectivis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을 선택과 연관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여기서 선택은 자기 형성self-making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합리적으로 결정하거나 자신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 같은 게 아니다. 라캉에게 주체화란 대타자-주체가 태어나는 상징적 구조(예컨대 언어, 문화, 제도)-가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특징짓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175).

스티븐 섀너브룩처럼 메티니데스도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서 관심을 끊을 수가 없었다(189).
-> 나도 이런 때가 올까?

남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늘 가짜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시적으로는 어떤 상징적 역할을 맡아 그 역할이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머잖아 우리는 노출되어, 우리가 갖고 있던 정체성은(본질적으로 그것은 결여를 특징으로 한다) 가짜였음이 탄로날 것이다(197).

<미주 20>
주이상스를 영어로 번역하면 ‘향락’(enjoyment)이다. 그러나 이 역어는 쾌(pleasure)뿐만 아니라 불쾌(displeasure)안에 있는 쾌락까지 포괄하는 프랑스 원어의 의미를 상실한다. - 다시 말해, 어떤 고통 안에 있는 그것은 꼭 즐길 만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 의미 때문에 주이상스는 라캉주의 정신분석과 관련한 영문 텍스트에서는 보통 프랑스어 그대로 표기한다(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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