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센델. 2010. 정의란 무엇인가?
=> 센델은 이 책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며 정의에 관한 철학을 소개하며 반박한다. 마찬가지로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며 정의에 관한 철학을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교육현장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물론, 이 작업은 정의에 관한 철학과 그 반론과 재반론 등을 완벽히 소화할 것을 전제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단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한마디로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정의의 의미부터 따져봐야 한다. 사실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가격 폭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주장은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정의를 바라본다. ...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는 전형적인 입장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행복이고, 하나는 자유다. (16-17)
-> 실생활에서 정의의 의미를 고민케 하는 다양한 영역들.. 교육에서도 이 세 가지 다른 각도가 있을 수 있다.
무공훈장 논란은 영광과 미덕에 관한 고대의 윤리관을 되짚어보아야 하는 특별한 사례일 수도 있다. 정의와 관련한 오늘날의 주장은 거의 다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분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를 지배하는 사고는 행복과 자유다. 그러나 경제적 분배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도덕적 자격을 갖추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24-25).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 테면 소득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33)
이 책에서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의 장단점을 살펴볼 것이다. 이중 행복극대화부터 시작하자. 시장 중심 사회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 공리주의에 눈을 돌려야 한다. ... 다음으로 정의를 자유와 연관짓는 이론부터 살펴본다. ...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 자유방임주의와 공평주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난다. ... 마지막으로 정의는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 보수주의, 종교적으로 우파와 동일시 된다. (34-35)
철학 중에서 특히 도덕정치철학처럼 다양한 주장이 공방을 벌이는 영역에서는 철학적 주장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 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적 주장은 대개 구체적인 상황에서 펼쳐진다. (35)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 문제에 직면했을 때,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중략)
우리는 긴장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옳은 행위에 관한 판단을 재검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고할 수도 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고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고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또 그 반대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기본이다.
도덕적 주장을 고민하는 이런 방식,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에 대한 판단과, 고심 끝에 단정한 원칙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은... (45)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어떻게 정의나 도덕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설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를 평생에 걸쳐 습득했다 한들, 단순히 일관된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는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해 얻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46)
도덕적 사고가 변증법이라면 동굴 이야기는 분명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즉 구체적 상황에 대한 판단과 그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비록 편파적이거나 교육으로 다듬어지지 못했을지라도 나름의 견해와 확신이 사고의 기반과 재료로 존재해야 한다. (46-47)
이 책은 사상의 역사가 아닌 도덕적․철학적 사고를 여행한다. 정치사상사에서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정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47)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55)
벤담의 ‘최대 행복’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주장이다. 이 반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반박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벤담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밀은 계산적인 원칙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원칙으로 공리주의를 다음어, 그것을 살리려 했다. (중략)
밀이 쓴 글을 읽으면 그가 개인의 권리와 공리주의 철학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 밀의 저서 <자유론>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어권 세계의 고전이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73-74)
-> 교실에서 나도 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라고.. 이런 말을 밀이 자유론에서 이미 했었다. 물론 그 전에 사람들도 생각은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밀처럼 체계화하지 못했었다. 공리=절대 다수(소수 아닌)인가?
밀은 공리가 궁극적으로 모든 윤리적 질문에 호소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의 공리는 넓은 의미의 공리라야 하고,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공리라야 한다. 밀은 우리가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74)
-> 이런 관점은 애덤스미스가 모든 개인이 자기의 부를 위해서 노력하면 사회전체의 부가 증대되었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 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탐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또는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시험은 한가지 분명한 반박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대개 고급 쾌락보다 저급 쾌락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우리는 더러 플라톤을 읽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보다는 소파에 누워 시트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던가? 이처럼 어떤 행위가 특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기 쉽기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80)
-> 많다고 생각하다. 특별히 학생들은 이러한 경향이 큰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이 의미가 있다. 그러면 이 문장을 활용하는 것은 ‘밀이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관한 반박을 쓴 마이클 샌델은 ... 마지막 문장’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
개인의 권리에서 그랬듯이 고급 쾌락에서도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 노력하지만, 되레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고 만다. (82)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1974)에서 자유지상 주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고 분배정의라는 익숙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 최소국가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떤 일도 강요받지 말아야 하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고, 그런 국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 (92)
-> 노직의 최소국가!!
누군가 당신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특정한 일 또는 보수가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 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직접 정하는 꼴이다. 이런 행위는 ...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을 당신의 소유주로 만든다. 당신에 대한 소유권을 그들에게 넘기는 행위다. (96)
-> 노직의 이러한 말은 교사의 자율성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요즘 필자는 이와 비슷한 일로 고민을 했었다. 필자와 직무 관련성이 없는 부장교사가 필자가 생각하기엔 교감이나 본인의 일로 생각되는 일을 맡겨서 필자는 직무상 명령권자인 교감에게 물어보고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부장교사는 화를 내며 일을 그런식으로 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2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터라 이번엔 넘어가면 안 될 것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처리하였다. 물론 교감의 명령에 따라 필자가 그 일을 하였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교직을 수행할 때 자신의 일과 상관없는 어떠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을 때 교사는 어떤 면에서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에게 예속이 될 것이며, 자신에 대한 소유권 또는 재량권 내지 자율권을 그들에게 넘어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유지상주의 주장의 도덕적 정수인 자기소유 개념. 내가 나를 소유한다면 나는 내 노동도 소유해야 한다. (96)
자기소유라는 개념은 꽤 설득력이 있다. 개인의 권리에 탄탄한 기반을 제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나는국가나 정치 공동체가 아닌 나 자신에게 속한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101)
-> 자율성의 근거: 노직같은 자유지상주의 주장인 자기 소유 개념. 나의 선택이 나 자신에게 속한다!
정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에는 시장의 역할이 자주 거론된다.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돈으로 살 수 없는, 또는 사서는 안 되는 재화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재화이며, 그것을 사고파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111)
-> 교육시장이라는 용어. 교육에서의 정의에서 교육시장이라는 용어의 의미
우리는 (가령 돈이 필요한 상황 같은) 부당한 압력을 받지 않을 때라야, 그리고 대안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을 때라야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36)
-> informed 가 다시 언급된다. 선택을 할 때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아야 함을 전제한다.
앤더슨 주장의 핵심은 재화라고 해서 다 같은 재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재화의 가치를 이익의 수단이나 물건의 효용만을 따져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세상에는 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도 설명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공리주의에도 도전한다. 정의가 단지 쾌락을 극대화하여 고통의 양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재화를,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을, 단 하나의 통일된 방법으로 무게를 달아 가치를 평가하면 그만이다. 벤담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공리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앤더슨은 모든 것을 공리로(또는 돈으로) 평가한다면 아이, 임신, 부모 노릇처럼 더 높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마땅한 사회적 행위와 재화를 비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높은 기준이란 대체 무엇이며, 각 재화와 사회적 행위에 걸맞은 평가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답은 자유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시각은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과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를 도덕성의 근본 차이로 인식한다. 이런 시각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사람이 다음 장에서 살펴볼 이마누엘 칸트다.
높은 기준을 이해하는 또하나의 시각은 재화와 사회적 행위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그것이 추구하는 바를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앤더슨이 대리 출산에 반대하면서, “임신이라는 사회적 행위가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특정한 목적, 즉 어머니와 아이의 감정적 유대를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어머니에게 그러한 유대를 맺지 말라고 요구하는 계약은 임신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기에 굴욕적이다. 그것은 “부모의 본분이라는 준거”를 “상업적 생산이라는 준거”로 대체한다. 어떤 사회적 행위의 준거를 찾으려 할 때, 그 행위의 주요 목적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핵심이다. (138-139)
-> 정의론의 흐름을 너무 정리 잘 함.. 논문에서 꼭 이용 가능!!
권리가 공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권리의 도덕적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개인은 타인의 행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자기소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내 삶, 내 노동, 나라는 인간은 내게 오직 내게만 속한다. 사회가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 공동체 주의의 주장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대답. 자기소유라는 기본권.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1780)가 출간된 지 5년 뒤에 나온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다. (149)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1)행복극대화(by 공리주의) 2) 자유(by 자유지상주의) 3)미덕 장려(아리스토텔레스) (150)
-> 앞에서도 적었듯이 교육에서 정의도 위 세 가지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 (152)
-> 자율성 정당화 문구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 (153)
-> 자율성이 합리적 자율성과 연관되는 이유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154-155).
->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자율적으로 행동한다 이다. 이것은 욕구(천성)에 따른 제멋대로의 행동이 아닌, 스스로 자기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선택’또는 자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것이다. 중력에 법칙에 따라 떨어지는 공이 타율적이고 자율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학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타율적일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155)
-> 교육목적의 철학 7장 자율성 부분에서 ‘비의존성(?)’과 일치하는 부분.
칸트라면 타율적 결정이라 부를 예다. 즉 이것을 위해, 저것을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이와 정반대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저 밖에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바로 이것이 사람과 사물의 차이점이다.
칸트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156-157)
-> 한국의 교육상황도 칸트가 말하는 타율적 결정이 널리 퍼져있다 하겠다. 교육 단계 어느 순간에도 타율적 결정이 이뤄진다. 학생들은 ‘무언가를 위해’공부를 하고, 학부모들/교사들도 무언가를 위해 교육활동을 한다. 스스로 목적의 주체가 아닌 도구로 전락해버린 한국 교육에 있는 학생이 있는 교육풍토를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그러니까 내 의지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때만이 나는 자유롭다. (165)
-> 자율학습과 자유학습의 차이, 자율적인 학급과 자유로운 학급의 차이. 자율에서는 학생 스스로 부여한 법칙이 있어야 하고 학생들의 의지가 그것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법칙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을까? 의지 또한 강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칸트식의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기에,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와 똑같이 용납될 수 없다. 또 그렇기에, 칸트의 존중 원칙은 보편 인권 원칙과도 통한다. 칸트가 생각하는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가 어디에 살든,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잘 알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173)
-> 필자가 아이들을 존중하는 이유. 아이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이유가 수세기전 칸트의 생각과 같다.
.. 그러나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알리가 하룻밤 경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이 (...) 최하층 사람이 부두에서 하루 동안의 비숙련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 알리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롤스는 <정의론>에서, 프리드먼의 견해에 반영된 자기 위안식 조언을 거부한다. 그는 격양된 어조로,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승진제도와 인사관행 등 교직 풍토를 보면서 현재의 교직 풍토는 정반합을 거쳐서 자리잡은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듬어진 최적화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롤스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교직풍토가 정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한 자기안식 조언이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선택하는 자아라는 생각은 존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합법 정부는 반드시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지,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신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어느 누구도 이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합의 없이 다른 정치권력에 예속 될 수 없다.
한 세기가 지나 이마누엘 칸트는 선택하는 자아에 관해 더욱 호소력 있는 논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공리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자들에 맞서, 우리는 스스로 취향과 욕구의 덩어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뜻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칸트식 자율은 합의보다 더 까다롭다. 내가 도덕법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우연히 생겨난 욕구나 충심에 따라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애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순수 실천 이성을 따르는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20세기에는 존 롤스가 칸트의 자율적 자아 개념을 받아들여 그것을 토대로 정의론을 주장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롤스 역시 우리 선택에는 도덕적으로 임의의 요소들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그것은 어려운 경제 사정에서 나온 선택이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사회를 원한다면, 실제 합의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우리의 특정한 이해관계와 이점을 접어두고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한다면 어떤 정의의 원칙에 동의하겠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율적 의지에 관한 칸트의 생각과 무지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에 관한 롤스의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도덕법(칸트)를 따르거나 정의의 원칙(롤스)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300-313)
-> 추상적 자아? 점점 선택하는 자아의 문제를 끌어내고 있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겠다.
공리주의적 이해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중략).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특성과 질은 하나같이 정의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 부분이 내게는 오류로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가 있어서 그에 따라 소득․권력․기회를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원칙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은 삶을 토론 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중략).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 책 요약 부분. 정의에 관해 나만의 언어로 기술하면 어떨까? 공리주의의 많은 사람의 이익이 되는 것,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공동체주의는 공동선을 강조하는 것?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 성향 하나는 시장과 시장 친화적 사고가 시장과는 거리가 먼 기준의 지배를 받던 전통적 삶의 영역까지 파고든다는 점이다. .. (중략).. 학생들이 표준화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경우 상금으로 포상해야 하는가? 학생들의 시험 성적이 올라갔다면 교사가 보너스를 받아야 하는가? (중략).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을 놓고 공개토론을 벌여야 한다.
-> 시장의 도덕적 한계 지적. 학생에게 문화상품권으로 상품을 지급하는 교육청과 학교의 현실태와 교원평가, 학교평가 성과금 제도가 사회적 행위인 교육행위를 규정할 수는 없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 .. 좀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 한국적 상황에서 가능할까? 공적 사회 구조물을 늘리는 것과 그래서 공적 소통 영역을 확보하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에서 정치가 도덕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은 더 많은 위험 요소가 있지 않을까?
2010. 7. 24
==책과 함께 온 DVD 동영상 중 인상깊은 내용==
학생 1 : 정의와 철학이 추상적이지 않고 삶과 깊이 연관된다. 일단 그것들을 고민하면 삶이 달라진다.
교수: 수업의 목적은 특정 도덕적, 정치적 견해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비판적 태도를 심어주어 중대한 도덕, 정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깊이 고민하는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
학생 2 : 질의응답 수업은 아주 중요한 학습법이다. 옳고 그른 판단이나 윤리는 독서나 암기로 터득할 수 없으니까이다. 그건 삶이자 세계관이고 사고방식이다.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반응이다. 중요한 건 로크나 롤스의 말이 아니라 학생 개인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사고와 윤리는 사고방식의 문제지 과거 사람들이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학생 3: 수업 목적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 일상과 관련이 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낙태나 징병 같은 주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데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않고는 의견을 낼 수 없는 주제들이다. 사안에 따라 내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교수: 우리가 가정에서 나오는 순서를 결정했을까요? 물론 아니죠. 그럼 왜 수입, 부, 기회가 그런 임의 요소에 좌우되어야 하나요?
학생 4: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한 가지 견해를 갖기 쉽다. 토론을 하다보면 수많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수: 마지막 수업에서는 동성혼을 다룬다. 일종의 시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즉 목적을 뜻하는 텔로스를 시험하는 것이다. 옳음과 정의를 판단하려면, 사회제도 즉 결혼의 목적부터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교육에서 옳음과 정의를 판단하려면 교육의 목적 혹은 교육제도의 목적부터 논의해야 할 시사를 얻는다.
학생 5: 공리주의든 공산주의든 호소력이 대단해서 결정이 쉽지 않다. 사실 수천년간 논쟁을 벌였지만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불가능해 보이면서 동시에 굉장하다. 지금도 비슷한 문제로 논쟁을 벌이며 더 나은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학생 6: 교수님은 학생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게 하고 5년 전, 천 년 전 철학이 여전히 살아있는 학문임을 보여주신다.
학생 7: 토론을 왜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을지라도 그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들과 씨름하고 그래서 '정의'수업이 존재한다. 주장을 살펴보고 반박을 연구하고 우리 생각을 보고서에 쓴다. 마지막에는 우리만의 일관된 철학을 정립한다. 이때 수업에서 다루었던 수천년간 이어져온 수많은 정치 철학이 바탕이 된다.
교수: 우리는 처음에 질문은 던진다. 왜 이런 논쟁이 계속 이어졌을까? 해결 불능의 문제를 던지는데도 그 이유는 우리가 늘 이 질문에 답을 하며 살기 때문이다. 공적 삶에서도 사적 삶에서도 철학을 피할 수 없다. 더러는 철학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칸트의 말로 수업을 시작했다.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쉼터가 될 수 있지만 거기서 독단적 사고로 방황할 수도 있지만 영원히 안주할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는 회의주의에 안주한다고 해서 이성의 부단한 활동을 억누를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수업의 목적은 그 이성을 일깨워 이성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 보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리고 그 이성이 앞으로 여러분을 부단히 괴롭힌다면 우리 성과는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당한 압력을 받지 않을 때라야, 그리고 대안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을 때라야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35)
-> 자율성에서 선택할 때의 일반적인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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