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_2010_둥지의철학_생각의나무
윤리적 덕목의 주체로서의 진정성과 책임.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윤리적 동물이며, 윤리적 동물로서 사는 것이 곧 탈출구가 없는 ‘지옥’에서의 삶을 의미한다면, 탈출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 차선은 무엇인가? 단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확신할 수 없다면, 가장 바람직한 덕목, 윤리적 선택의 평가의 잣대는 무엇일 수 있는가?
여기에는 네 가지 잣대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잣대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나의 태도와 행동이 남들의 삶과 맺고 있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인과적 관계의 변수를 인정하고 가능한 모든 변수를 냉철하게 계산하고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능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잣대는 나의 도덕적 선택이 남에게 미치는 결과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도덕적 객체를 배려하는 나의 마음의 절대적 진실을 따르는 일이다.
세 번째의 잣대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나의 책임감이다. 타자와의 도덕적 인과관계의 차원에서, 그것의 구체적 결과가 의도한 대로 긍정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전혀 반대되는 것이든지 상관없이 나는 내가 택한 태도나 행동의 도덕적 결과에 대해 절대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설사 나의 태도와 행동이 내가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달리 수많은 도덕적 객체들에게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남들과 관련하여 내가 택한 태도와 행위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지고, 그 태도와 행위에 대한 남들의 도덕적 평가와 비판을, 묵묵히 그리고 당당히 받아들여야 한다.
네 번째 가장 일반적인 잣대는 나의 구체적 태도와 행위가 모든 차원에서 모든 것들에게 미치게 될 구조적 결과를 고려해서 나의 개인적 삶, 가족, 사회, 환경, 생태계, 자연, 궁극적으로 우주 전체와 바람직한 ‘우주적 전일주의(cosmic holism)’를 맺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 선택을 일종의 관념적 ‘가치의 둥지 틀기’로 생각하며, 그러한 건축의 모델을 동물들 특히 조류들이 트는 ‘둥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한 인간이 도덕적 차원에서 위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객관적으로’ 즉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의 태도, 행동 그리고 삶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부정적인 비판을 받더라도, 그리고 비록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더라도 실존적 주체로서 그 자신은 성자(聖者) 못지 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도덕적 문제는 공리적, 사회적, 법적, 객관적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이 느끼는 내면적 경험의 정신적 문제다. 궁극적으로 도덕적 문제는 선/악의 문제이며, 선/악을 결정하는 절대적, 객관적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악은 인간 각자가 나름대로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끌려 죽는 날까지 항상 새롭게 창조하는 가치일 것이다. (231-233)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이나 화학에서의 설명이 인과적인 데 반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활동은 그것들이 최소한의 의식을 갖고 있는 한에서 목적론적으로 설명된다. (238)
-> 때문에 교육목적론이 파생될 것임.
가치가 발견이나 소용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치라는 개념이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 가치평가와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239)
-> 교육은 가치로운 활동이라는 것. 이때 가치는 교육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의식의 내용과 태도일 것임.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고 지향하는 꿈과 같은 것 실제로 있는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바라는 상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의욕의 추구 즉,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종류에 속하든 이상적 의욕 추구로서의 가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즉 인간은 가치지향적 동물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의 가치지향성을 인간의 존재론적 특수구조에서 발견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한편으로는 즉자(卽自) 즉, 무의식적 존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대자(對自) 즉, 자의식적 존재로 양분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은 둘 중 하나에만 속할 수 있다. 전자는 그 자체로 자족하는 무의식적 존재를 지칭하며 후자는 언제나 빈 상태 즉 ‘없으면서 있고’ ‘유(有)이면서 무(無)인’존재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후자에 속한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그냥 그대로 충족된 상태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무엇인가가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동물로 존재하며,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그것을 넘어 보다 만족스러운 어떤 이상을 구현하려는 욕망에 차 있다. ‘가치’란 그러한 인간의 어떤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의 본성과 뗄 수 없는 인간의 지향성이 투영된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가치는 언제나 평가적이다. 평가는 우주의 일부가 아님은 물론 인간의 일부도 아니고 오로지 인간의 존재양식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초월적 욕망과 인간이 자율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지향성이 필연적으로 투영될 수밖에 없는 그림자와 같다.
(241-242)
-> 교육은 가치지향적. 인간은 자율적 존재.
현대의 분자생명과학 책이자 철학 책인 <우연과 필연>의 저자 자크 모노. (253)
동양이나 서양 모두 전통적 윤리의 행동규범들은 우주․대자연의 객관적 질서/법칙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동시에 그러한 질서․법칙에 의해서 정당화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유교의 ‘천명(天命)’이나 도교의 ‘도(道)’라는 개념, 힌두교의 리타(rita) 즉 ‘우주의 질서’라는 개념, 그리고 불교의 ‘법․다르마(dharma)'란 개념들은 각각 그러한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유대․기독교․이슬람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유일신이나 아니면 기타 샤머니즘의 수많은 신들이 인간과 독립되어 인간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정신적 원리로서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모노에 의하면 인간이 준수해야 할 행위의 규범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따라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가치여야 한다. 전통적인 윤리규범이 타율적인 데 반해서 모노의 윤리적 규범은 자율적이며 인간중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개의 윤리관은 사뭇 다르다. 모노의 윤리관은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월등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윤리학을 지배해온 쾌락주의, 공리주의, 의무주의라는 세 가지의 합리주의적 윤리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근대 윤리학이 일반인들의 상식에 근거한 데 반해서 모노의 윤리는 분자생물학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근대 윤리학보다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255-256)
모노의 윤리관과 그 이론적 한계.
하지만 모노의 윤리학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윤리적 배려를 떠날 수 없음과 인간이 그렇게 진화된 이유를 설명해주지만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선택의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항상 윤리적 차원에서 크고 작은 결단을 해야 하는 동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노 윤리학의 더 큰 문제는 그의 ‘규범’에 관한 주장에 들어 있는 모순이다.
모노에 의하면 어떠한 가치도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주관과 독립된 우주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이 주관적으로 부여한 중요성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 규범을 포함한 모든 규범은 가치와 마찬가치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산출하고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법과 같은 지침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침은 우주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결정할 수 있다. 우주에는 어떠한 행동의 규범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윤리적 규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리적 규범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된다고 기록된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윤리적 행동이나 태도에 관한 일반적 원칙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아주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어머니의 존엄사를 시행해야 할지 아닌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윤리적 잣대에 맞추어 살아야만 되는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행동지침으로서의 윤리적 범주를 나는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 있다. 내가 왜 저 친구같이 충동에 따라 아무런 윤리적 규범에 의해 규제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노가 주장하는 대로 모든 규범은 우주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의적 결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노가 밝혀 준 대로 우주의 모든 것에 관한 객관적 지식은 근원적으로 주관적 결단으로서의 가치와 그것의 임의적 규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이 유일하게 윤리적 동물로 진화한 이유도 인간이 그렇게 살기로 결단을 내려 윤리적 규범을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인간이 윤리적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며,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어떤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모든 규범이 그때마다 한 인간의 자의적 결단의 산물이라면, 인간으로 산다는 것, 즉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항상 괴로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괴로움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고 다른 동물의 존재의 지평을 초월한다. 인간의 삶은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이성으로만 이해할 수도 없다. 논리와 이성은 인간적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모노의 윤리학은 구체적 상황에서 윤리적 고민에 빠져 있는 실존적 인간에게 구체적인 지침이 될 수 없다. 윤리적 결단의 불확실성은 모노의 윤리학만이 아니라 모든 윤리학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다.
이것이 더 선한가 저것이 덜 악한가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이 윤리적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런 것을 해결해줄 수 있고, 그런 것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적 물음과 윤리적 행동이 고려해야 하는 변수는 무한히 많고, 모든 윤리적 문제는 절대적으로 완전히 완전히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적 문제에는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대답이 없으며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윤리적 결단의 옳고 그름에 관해, 어떤 삶이 가장 바람직한가 라는 문제에 관해 우주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두고두고 사유하고 고민해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 각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없다면, 그러한 ‘의미’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마음의 평화라는 것이 우리가 잡다한 동물적 정념에 사로 잡힌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었을 때 가능하다면, 마음의 평화는 우주의 삼라만상과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작동원리에 대해 투명한 세계관 즉 철학적 혜안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정리한 대표적 저서의 제목으로 사용한 <윤리>라는 낱말은 ‘존재론’,‘인식론’ 등과 동일한 지평에서 철학의 한 분야를 뜻하지 않는다. 극서은 ‘철학체계’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처럼 자신의 철학체계를 ‘윤리’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한 까닭은 그에게 이론과 실천 즉, 지식과 삶이 서로 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삶이라는 행동의 문제, 즉 진짜로 ‘의미’있는 삶을 사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은 근원적 의미에서의 ‘윤리학’이었으며 그는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치에 맞는 삶, 즉 우주의 원천적 이치에 따라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일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256-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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