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2013).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최진석(2013).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평소 '결'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 나로서 주체성의 의미를 동양적 인문학 관점에서 발혀준 소중한 책이다. 

자기 내면에 비밀스럽게 웅크리고 있으면서 불현듯 일어나는 충동질(10)
-> 내 경우는 무엇인가??
(아래 전문)
'좋아하는'을 통하면 확실히 보편적인 기준이나 합리적 계산 혹은 객관적 표준 등을 벗어납니다. 누구나 숭앙하는 '이념'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치 있다고 믿는 사회적 합의를 추종하지도 않습니다. 체계를 초월할 수 있지요. 자신만의 욕망에 집중할 뿐입니다. 자기 내면에 비밀스럽게 웅크리고 있으면서 불현듯 일어나는 충동질, 자기만의 고유하고 비밀스런 어떤 힘을 따릅니다.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고유한 바로 '그 사람'으로 살아 있습니다(10).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애써 자기 말을 해보려고 몸부림치는자(12)... 들은 말을 여기저기 옮기지 않을 수 있는자, ..., 이성으로 욕망을 관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욕망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자, ... 바로 이런 자들이 '사람'입니다(12-13). 
-> 나도 그랬었다. 

잡스는 지금의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일을 해야, 또 어떤 방식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더 행복해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한 사람입니다(24). 

인간이 움직이는 흐름을 읽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26). 

그런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광기의 역사>>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 같은 책들은 그들의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매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논문들이죠. 마치 장르를 새로 개척하는 것과 같습니다(32). 

미국에서 랭킹 50위, 100위 안에 드는 기업의 CEO들은 MBA 출신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 대개는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34). 

인문학 출신이라야 변화의 흐름에 부합하는 정확한 의사 결정을 하여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직종이고, 또 그만한 단계라는 것이지요(35).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치나 교육 분야에서 모두 다 우리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고 우리 스스로 비전을 만들어서 시행했던 게 아닙니다. 모두 외(38)부에서 들여온 것들을 받아서 수행해 왔던 것들이죠. 이제 우리만의 메시지나 비젼으로 새로 조정되지 않으면 이 혼란이 오래가리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한계에 도달했어요(38-39). 

만약에 여러분이 '좋다' 내지는 '나쁘다' 하는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어다면, 여러분은 아직 리더로서는 준비되지 않는 겁니다(43). 

리더는 우선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삶을 끌고 가는 사람한테는 카리스마가 생기고 향기가 나게 마련입니다. 대중들은 그 향기를 따라서 믿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단지 '좋다'와 '나쁘다'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면, 여러분은 아직 내적으로 성숙한 주체력, 이것을 갖추지 못한 거예요. ... 여러분이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판단을 했다면, 여러분은 그저 정치적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인문적 판단이라고 할 수 없지요. 정치적 판단은 자기 머릿속에 있던, 자기가 믿고 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을 따라서 세계와 만나거나 혹은 그것을 근거로 세계를 해석한다는 거예요(44).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 (성인의 일반인과 다른 특징은) 바로 조짐을 읽는 능력입니다(45)

'대답'하지 않고 먼저 '질문'을 합니다. "5년, 10년 전만 해도 저런 일이 불가능했는데 이 세계에 무슨 변화가 있길래 저런 일들이 가능해졌지?" 바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46). 

마르크스는 오랫동안 근대인들에게 신주 받들 듯 모셔졌던 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즉 우리가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구체적인 물질적 기반, 즉 사회경제적 조건이 피워 낸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말해 준 겁니다. 이성이 본질적이거나 근본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부차적인 것임이 폭로된 것이지요(50). 

한편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리비도)이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무의식이야 말로 인간의 의식 활동을 지배하는 큰 힘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매우 명징한 형태로 환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믿었던 이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무의식의 현현이 불과한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에는 자아라는 매우 튼튼하고 동요하지 않은 실체 대신 그 깊이를 알기 어렵고 성적인 의미가 강한 무의식의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프로이트가 폭로한 겁니다. ... (니체가 왜 현대?)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라는 얘기겠지요(51). 

서양 사상의 원천은 '사유'지만, 동양 사유의 원천은 구체적 세계에 대한 '경험'입니다(53). 

동양이 현대와 관련된다면, 바로 이런 구체적 경험성과 관계성이라는 특징을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점이겠지요. 사유의 구조물에서 벗어나 땀 냄새나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것이 현대인들의 경향이라면, 노자나 장자 혹은 <<주역>>과 같은 동양적 사유가 큰 역할 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바로 이런 특성들에 기대어 있습니다(54). 

(이과...) '리理'라는 글자를 볼까요? 옥돌에는 무늬가 있지요. 즉, 결이 있는 거예요. 옥돌에 새겨진 무늬를 '리'라고 해요(57). 

한편, '문文'이라는 글자를 봅시다. '문'은 원래 무늬라는 뜻입니다. 우리 옷에 무늬가 그려져 있지요. 그것을 '문', 문양이라고 합니다. 무늬는 누가 그립니까? 인간이 그려요. 그럼 인문人文은 뭐냐?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말입니다. / 인간은 그냥 들쑥날쑥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르고 개성이 있지만, 이 다른 개성 모두 다 한 결, 한 무늬 속에서 움직이는 다름일 뿐이에요(58). 
-> 개체로서의 결이 공동의 결 속에서 산다. 

이 세계에서 살면서 생존을 효과적으로 잘 도모하고 자신만의 의미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이 무늬의 정체를 알아채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까? 이미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이지요(65). 

오직 텅 빈 마음을 가지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66). 

그렇다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기억, 즉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벗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오직 자기 자신만 남습니다. 자기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자기로만 남은 이 사람에게는 인간이 그려 나가는 무늬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그러면 이 무늬가 어떻게 그려질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어떤 폭으로 움직일까를 꿈꿔 볼 수 있습니다. 상상이 시작되는 것이지죠. 물론 이 과정에서 기존에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은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오직 부교재 내지는 보충 자료로서만 행세하게 됩니다. ... 내가 나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혹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지배하고 지식과 가치를 나로 착각하고 있지 않는가?(67)

'아무거나' 안주 개발자는 한국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68).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 자기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사람, 이건 '죽은 사람'입니다(69). 

가장 원초적인 욕구조차도 추측해야 하고 불확실한데,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지금 뭘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죽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 /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집단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우리의 것'이에요. '나만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 즉 '우리의 것'을 벗었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내가 이념 등과 같은 감옥을 벗어난다는 말은 그것들이 더 이상 주(71)인 행세를 못하게 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뭐가 남을까요? 뭐가 남아서 주인 자리를 차지할까요? 바로 '나'입니다. 바로 온전한 '나' 일수 밖에 없습니다. / 그럼 여기서 이념이나 가치관 대시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온전한 '나'는 무엇으로 확인이 됩니까? 내가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온전한 '나'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에게 공유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어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어떤 것으로서는 고유한 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어떤 것, 나를 나이게 하는 어떤 것은 바로 나에게서만 비밀스럽게 확인되는 '욕망'이지요(71-72).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어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기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 됩니다(75). 

즐길 수 있어야 또 잘할 수 있지요. 즐겨서 잘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그 잘하는 성취로 한국 사회를 더 간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사명감에 짓눌려 일을 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행복한 개인들로 자라나서, 그런 개인들이 이룬 사회라야 강하고 튼튼하며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도덕이 유지되고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76). 

"저는 ~할 때가 제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77). 
-> 내 욕망을 찾는 기준 : 그것을 할 때 편안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라는 것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구조로만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라는 것은 사실 '나'들의 총합일 뿐이에요. '나'들이 합해져서 '우리'가 되었는데, 이성적인 구조 속에서는 '우리'의 실재성을 강조하다 보니, '나'의 존재성은 경시해야 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실선으로 그려지고, 오히려 '나'는 점선이나 그림자로 그려져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사실상 실재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데도 말이지요(81).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82)
->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언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바라는 일을 할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 사람은 잘할 수 있어요(84). ( 왜냐면 '우리'아닌 '내'가 있기 때문)

자기가 자기로 사는 방법은 별다른 게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자리 잡고서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체계로부터 이탈하는 길 뿐이에요. 노래하는 체계에서 이탈하여 자기 자신의 내적인 욕망을 직접적으로 발출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노래가 됩니다(85). 

인문학은 주체적인 삶, 그리고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학문입니다(91). 

지식을 쌓는 것보다 지식을 다루는 힘을 갖는 데 집중해 봅시다(92). 

...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족이나 이웃들과 더 잘 지내게 되었습니까? ... / 만약 이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지식이나 경험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유도 주지 못하고 행복도 주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지식을 쌓고 경험을 늘리는 일에 몰두할까요? (93)

어린이를 미성숙한 상태로 본다는 것은 어른의 단계를 성숙한 단계로 전제하고, 그 시각으로 어린이들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면 어린이는 어린이로서의 삶, 어린이로서의 세계를 한 번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아직 미성숙한 어른으로서만 대접받는 것이지요. 어린이를 어린이의 세계로 돌려주어야 합니다(98). 

신입사원들의 세계를 신입사원들한테 돌려줘야 해요. 그런 신입사원들이 자기 멋대로 해볼 수 있을 때, 그 회사는 세계의 새로운 흐름에 자연스럽게 맞춰질 수 있을 겁니다(99).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버릇없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어 보는 일이에요. 왜? 익숙하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 무엇이냐? 관습이거나 이념이거나 가치관이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103).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가 없기 때문이에요(108). 

학교는 하나의 이념으로 관리되고 있어요. 하나의 기준을 강요하는 곳이 학교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최고의 덕목이지요. 무엇에 순종해요? 성적, 공부, 학습, 대학입시 등을 잘해 낼 수 있게 만들어진 기준에 순종하는 거잖아요? 이런 내용이 기준(110)이 되고 그것이 절대화되어 있으면, 이 절대 기준을 근거로 학생들은 서열화됩니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는 이 서열화가 단순히 학습의 능력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 자체의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곳에서 혈기 방장하고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학생들이 온전히 버텨 나겠어요? 이 절대 기준에 의한 서열화의 맨 밑에 있는 학생일수록 그 학생은 자기가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겠지요?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자기 존엄성을 갖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어버리죠. 이건 불행입니다. 인격적 왜곡을 피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 자기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긍정해야 합니다(111). 

자신에 대한 무한 애정!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그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112). 

숟가락을 일반적인 개념의 고정성에서 벗어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때, 그 아이는 일반명사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겁니다. ... 인간이 개별적 주체로 등장할 때에만 감정과 감수성이 개입되는 다양한 일들, 이를테면 인격적 성숙이랄지 미학적 삶이랄지 또는 관용과 배려 등등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일반'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자기 자신의 내면 즉 주체성과 직접 대면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114). 

이와 달리, 장자는 어떤 상황에 따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여, 큰 박과 자기에게 모두 상처받는 일이 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겁니다(115). 

고정된 개념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성을 획득한 것이지요. 즉 창의적 행위인 거예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대개 이러합니다. ...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존재할 때만 자기가 자기로 존재합니다. 일반의 구속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라는 고유명사로 돌아오길 바랍니다(116). 

여러분, 꽃이 이 세계에 존재합니까?
꽃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보는 것은 꽃이라는 명사에 속한 그것을 보는 거예요(119).  

여러분, 이념 따위는 잘근잘근 씹은 다음에 과감히 뱉어 버리세요. 이념 같은 딱딱한 명사들이 목울대에 걸려 있는 한 말캉한 동사들이 입을 통해 나오기 어렵습니다. 몸속에 들끓는 욕망의 꿈틀거림이 이념과 개념의 필터에 막혀 터져 나오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념 따위의 명사들을 몸 밖으로 뱉어 버리세요. 핏발 서린 이념의 눈빛은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121). 

그런데 왜 우리는 개념의 구조로 되어 있는 지식이 우리의 구체적 실생활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틀인 이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확신체계인 신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개념'에 스스로 굴복당한 형국입니다. 마름을 주인으로(112) 착각한 거지요. 마름은 개념이고, 주인은 실재하는 세계이자 바로 '나'입니다. 개념은 실재하는 세계와 살아 움직이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마름 같은 것인데, 이 마음이 오히려 실재하는 세계를 제어하거나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가 주인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념이나 개념의 정체를 정확히 보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122-123). 
-> 학부 때 배운 "이론은 세계를 보는 틀과 같은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리게 한 글귀다. 

2차방정식을 풀 줄은 아는데 이것이 이 세계에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대표적으로는 저예요. 2차방정식은 풀 줄 아는데, 그것이 이 세계의 어떤 운동 상태를 표현하는 것은 모른다? 이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죠. 우리가 개념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실재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 모습니다. ... 그런데 수학을 하는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 풀이에 있습니까? 실재 세계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까? 이 세계를, 이 세계의 상태, 이 세계의 운동 형식을 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수학이에요. 수학을 잘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계를 숫자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술을 한다는 건 또 뭡니까? 이 세계를 색깔로 표현한다(126)는 거예요. 그럼, 철학을 한다는 게 뭐냐? 이 세계를 개념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모두 다 최종 목적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이 세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127). 

근본적인 이념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대개는 수입된 것인데 그것을 우리 토양에 맞게 변경시킬 힘을 우리가 갖지 못한 거예요. 그건 뭐냐? 왜 힘을 갖지 못했어요? 인문학적 자아를 확보하지 못한 거예요. 자아가 이념이나 신념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변화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아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봅니다.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하지만 보이는 대로 볼 수는 없게 됩니다. 인문적 통찰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되었을 때 실현됩니다. 그래야만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이념의 생산자가 될 수(129) 있습니다. 이념을 보위하는 자가 아니라 내 실정에 맞게 이념을 수선할 수 있습니다. 남이 연주하는 음악만 기계적으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쏙 들게 변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 그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 이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비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우리는 딱 여기까지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메시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더 이 이상 타인이 만든 비전과 메시지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삶을 살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비전과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 수 있으려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구체적 토양에서부터 사유를 출발시켜야 합니다. 이론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에서 이론을 생산하는 주도적 힘을 가져야 합니다. '이론 먼저 문제 나중' 아니라, '문제 먼저 이론 나중!'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상상력이고 창의성입니다. 주도적인 삶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우리가 아니라 '나'로 존재하고 '나'로 활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130).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한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해서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표현합니다. ... 무위의 경지란, 쉽게 말해,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멋대로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134). 

노자는 이와 정반대였죠. '바람직한 일'보다는 '바라는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보편적 이성에서 벗어나 개별적 욕망에 집중하라는 얘기일 테지요. 개별적 욕망에 집중해야 멋대로 할 수 있고,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습니다(136).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냐? 행복입니다! 갈등 속에 휩싸이지 않게 해줍니다(155).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어야 한다(163). 

노자는 '함덕지후 비어적자 含德之厚 比於赤子', 곧 "두터운 덕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어린애와 같다"라고 했어요(174).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카리스마죠. 아우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덕의 표현입니다(175). 

애태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장자>>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일 겁니다. 애태타는 몰골이 매우 추했어요. ... 애태타가 추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79). 

인문적 활동은 지식과 이념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신이 주체로서 우뚝 섰을 때라야 가능하다. 인간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라야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여 인문학적 통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동선을 편견없는 맨 얼굴로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매력적인 힘도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180). 

그런데 왜 덕은 잘 발휘가 되지 않을까요? 방해꾼들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왜 우리는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지 못할까요? 그것은 다른 것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식, 이념, 신념, 가치관, 믿음 체계 등등이(182) '나를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언어적 표현으로 형식화 됩니다.(182-183).

이 virutus는 그리스 말인 아레테arete의 라틴어식 번역어인데, 아레테는 사물들이 자기에게 있는 특별한 기능을 잘 발휘하여 도달할 수 있는 아주 탁월한 상태를 의미합니다(184).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힘)
"너만 알고 있어라"라고 주의를 당부하면서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다 알게된다는 것입니다(187). 

아는자는 말하지 않고, 
말한자는 알지 못한다 (도덕경 56장)(187). 

이런 사람에게는 순간적이고 속세적인 명성이 중요하지 인격적 깊이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189)

이성이 지배하는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를 구해 내라 하는 겁니다. 집단 속에 용해되어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 고유한 자기로서의 자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에 갇ㄴ힌 나를 살려 내라는 것입니다(191). 

서양 학자들에게 "당신은 왜 이 공부를 합니까?" 하고 물으면 묻는 사람이 머쓱할 정도로 간단한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답의 길이도 매우 짧습니다.
"Because I like It."
그 사람들은 "나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라고 단순하고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거창하지 않아서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저는 이 대답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창의적인가? 왜 그 사람들의 사회가 우리 사회보다 부패지수가 낮은가? 왜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행복한가? 제가 보기에 이유는 바로 "Because I like It!"라는 대답 습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그걸 좋아하니까 한다(195)
->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모든 것은 욕망 다음의 일입니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198).

기말고사 때 학생들에게 이런 시험문제를 내곤 합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근거로 문제도 당신이 내고 답도 당신이 쓰시오(단, 어떤 개념을 설명하거나 논술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님. 문제에게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건이 포함되어야 함)."(199)

대학원에 들어오면 졸업 논문을 쓰는 데에 모든 노력을 집중합니다. ... 학생 스스로 모든 것을 정하게 합니다. 학생들을 방목하는 셈이지요(200). 

학생에게 문제의식이 없음을 지적하고, 문제가 자신에게 드러날 때까지 차라리 자퇴를 하는 게 어떤지 권하기까지 합니다(202). 

누구도 나의 멘토일 수는 없어요. 옛사람들이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고 했듯이, 멘토는 죽이세요. 결국 진짜 멘토는 내 안에 있는 나일 수밖에 없어요. 욕망으로 존재하는 내가 나의 진짜 멘토란 말입니다. 멘토는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204). 

멘토에 의존할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모시는 스승의 말씀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 지신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가 되어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 멘토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 자기 멋대로 해야 합니다(205).
->내 맘 대 로

불안정? 이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누구도 결함이 있거나 부족하거나 죄인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생명력이 넘치는 자족적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208). 

그런데 세상은 이런 하찮게 보이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209). 

훌륭하다고 숭앙받던 사람들이 어디서 무너집니까? 바로 일상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은 구체적 일상을 같이 영위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간 성숙의 척도는 높고 크고 거대한 곳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더 치명적이죠(210). 

관념의 세계는 진리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저기'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214). 

그 버스를 자기의 상황이나 의지에 맞게 해석해 버리는 일, 소유적 태도입니다. 자기 의지의 개입없이 그냥 그 버스 자체로 놔두고 받아들이는 일, 존재적 태도입니다. 세계를 자기의 관념 세계로 끌고 들어와 고정시키는 일, 소유적 태도 입니다. 자기의 관념 세계에 제한하여 고정시키지 않고 세계를 세계 그대로 놓고 보는 일, 존재적 태도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의 영어 표기가 "To Have or To Be"인 것처럼, 자기 의지에 맞추어 자기가 가져 버리려고have 하는 것이 소유적 태도이고 그것을 그것이게be 하거나 그것을 그것 그대로 놓아 둘 수 있는 태도가 존재적 태도이지요. 비틀즈가 부른 <Let It Be>만큼 존재적 태도를 잘 드러낸 노래가 있을까요?(218)

'오상아吾喪我' 라는 구절을 볼까요? 오吾는 새로워져서 우주의 질서에 동참하거나 자유의 경지에 들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 자아이고, 아我는 가치와 이념에 의해 고착되고 굳어져 있는 경식된 기존의 자아를 말합니다. 장자에게 소요는 먼저 기존의 경색된 질서에 의해 질식해 가는 자아를 해방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224). 

자기를 특정한 모습으로 견고하게 지켜 주던 가치와 이념을 모두 벗어던지고 난 후, 어떤 모습으로도 특정화되지 않으니 맥 빠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225). 

익숙함과 결별하여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철학은 비로소 시작됩니다(240). 

모든 불안을 이겨내고, 돌아보려고 용을 쓰던 바로 그 힘이죠. 그 힘이 바로 용기가 아닐까요?(245)

푸코는 이런 능동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려는 과정에서 '자기 배려 epimeleia heautou' 라는 말을 제시합니다. 자기 배려는 자기 이외에는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 자신만을 지향하는 것이죠(249). 

자기가 욕망의 주체로서 작동할 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 호기심을 한번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이에요. 대답하는 곳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하는 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257).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욕망이 발동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제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제가 독립하지 못하면, 즉 주체가 덕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면 세계를 자신만의 맨 얼굴로 마주할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261). 

(자기를 만나는 법)
1. 
저는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기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글쓰기를 듭니다(263).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몸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 그것이 바로 글이죠. 글은 솔직하게 써야 제대로 나옵니다. 진실하게 텅 빈 마음으로 자기를 드러나게 할 때라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죠(264).
->키보드 typing도 되나?

2.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장치는 바로 운동입니다(265).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입니다(267). 

3.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장치'는 낭송입니다(268). 

(시카고 플랜)
어떤 분야의 학생이든지 졸업 때까지 100권의 인문 고전 도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죠(274).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놀고 싶은 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하였던 것, 이것이 힙합이라는 장르의 출생 인자입니다. 장르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자기가 하고(275) 싶은 대로 못하는가? 대답만 할 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또다시 말하면, 튼튼한 자기 검열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가 관리받고 있기 때문이에요(275-276).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모르는 것이다."(277)

이제 미래는 집단 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 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 대신에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278).

저는 여러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장르는 자기로부터 나온 이야기에서 흘러나옵니다(280).

진정으로 봄을 느끼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대충 말하지 않아요. '봄'이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아요. 대신 봄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을 접촉하려 하죠. ... 봄을 그저 '봄'이라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죠(283).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론을 보지 않아요. 문제를 봐요(284).

"오직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292)

삶의 무늬는 죽으나 사나 '나'의 무늬여야 합니다(293).
-> 나의 '결'에 대한 생각과 비슷하다.

나를 가벼운 곳에 두지 않습니다. 나를 천한 곳에 있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나를 호되게 다루지 않고 조심조심 격려 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줍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남겨둡니다. 칙칙하지 않습니다. 밝고 환합니다(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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