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2014).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문학동네
20여년 동안 이곳 저곳에 기고한 글을 모은 산문 모음집
서평에 솔직한 그의 문체와 글 속에 강인한 문체가 대조적이다.
전체를 읽진 않고, 관심있는 제목 중심으로 발췌해서 읽었다.
(행복방정식)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148).
동양 문화권에 속한다면서 동양의 사유방식, 동양적 삶의 지혜는 시궁창에 던지고 탐욕과 선망의 코드에 나포되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세계 전체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 치명적 결함을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과제이자 우리 사회의 과제다(150).
(이 시대의 스승상을 말하기)
교육이 있는 곳에 '스승'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절의 교수는 탐구, 토론, 강의의 자유위에 성립하는 대학교육의 실천적 스승이기보다는 '스승'의 조롱, 배반, 캐리커처에 더 가깝다(173).
(교육폭력이 더 문제다)
학교 폭력은 실은 그보다 더 큰 어떤 폭력으로부터 빚어지는 현상적 측면의 하나다. 그 더 폭력은 '교육 폭력'이다. 학교 폭력이 일부 학생들의 폭력, 갈취, 위협 같은 일탈적 행동을 의미한다면 교육 폭력은 우리 사회 전체가, 학교와 학부모와 정책당국이 똘똘 뭉치다시피 해서 감히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파괴하는 행위, 곧 '교육 그 자체의 폭력성'을 지칭한다.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고 북돋우자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 목적이고 교육의 가치이며 교육이 교육인 이유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의 그 본질 목적, 가치, 그것의 양보할 수 없는 내적 선을 시궁창에 내던진 교육, 아이들을 키우고 살리기는커녕 죽이는 교육을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강제해오지 않았는가. 이 차원에서의 교육 폭력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문제이며 교육 그 자체의 문제, 사회 전체의 '공모(共謨)'가 개입된 문제다(244).
(디지털 시대의 우울)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관찰 사례들 가운데 단 두 개만을 든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례가 디지털 기술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깊은 관계가 있다. 디지털 기술 시대의 '원주민'을 자처하는 젊은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환경 속에 태어나 자라면서 정신 분산을 강요하는 과잉 자극과 과잉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사고력,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의 파탄에 가까운 위기를 만나고 있다. 이중에서도 사고력의 약화는 치명적인 것이다. 인간만이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기계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잊고 있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지적 정서적 능력의 결손, 자기를 만들고 형성해가야 하는 성장기 교육의 위기, 넓고 깊게 지식의 토대를 닦아야 하는 시대의 생존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런 위기로부터 탁월한 개인, 책임 있는 민주 시민이 길러질까? 디지털 시대의 교육 종사자들은 밤을 새우며 해법을 찾아야 할 문제들 앞에서 고민이 많다(35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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