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2014). 생각의 시대. 파주: 살림출판사
정보 혁명은 우선 지식의 폭증을 불러왔다. 지식은 문자가 발명된 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인쇄술이 발달하고 대중 교육이 이루어진 근대 이후 그 증가 폭이 다시 한 번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옛일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정보와 자식의 증가 속도가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컴퓨터의 정보처리 속도는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하고 있고, 2030년이 되면 지식이 3일마다 2배씩 늘어날 것이라 한다. 예측인 만큼 숫자는 어긋날 수 있겠지만 이른바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어긋날 수 없다(9-10).
그 탓에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시대가 도달한 지식수준을 따라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는 이제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지식은 컴퓨터에 내장된 검색엔진을 이용해 어느 때보다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에 도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마치 너무 밝은 빛이 우리의 눈을 실명케 하듯이, 폭증하는 정보와 지식이 우리의 전망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10).
탐사단의 총지휘는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레너드 울리(1880-1960)가 맡았다.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유적 발굴자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과 고고학을 공부한 울리는 불과 27세였던 1907년부터 5년간 이집트와 누비에서 피라미드와 신전들을 발굴했다. 연이어 1912년부터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와 함께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히타이트의 도시 카르케시미를 2년동안 발굴하기도 했다.
로렌스는 울리의 옥스퍼드 대학교 후배였지만 나중에 아랍의 독립 전쟁에 참가해 영웅이 된 인물이다. 훗날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용기와 패기에 넘친 이 젊은이는 자전적 에세이 <지혜의 일곱 기둥>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39).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40)
-> 나의 낮의 꿈은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몰두했던 ‘아르케’와 ‘아레테’에 관한 탐구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호기심’내지 ‘경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 곧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했다. 설령 우리가 철학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경이심thaumazein'에서 나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깊은 바닥에는 그 같은 절실하고도 은밀한 욕망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3부 ‘생각을 만든 생각들’에서 보다 자세히 드러나겠지만,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 등 호메로스부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생각의 도구들도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이것들도 모두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하는 보편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개발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양 문명을 구축했다.
정리하자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축의 시대의 고대인들에게 있어 보편성은 자연의 법칙인 진리와 인간의 법칙인 미덕의 근거였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고, 이상적이며,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을 도라고 했든, 법이라고 했든, 또는 로고스라고 불렀든, 그것은 변함없는 자연법칙이자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일 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성을 탐구하고 추구했다. 결국 인간은 (불의 사용법이 그렇듯이) 살아남고 번영하려는 실존적 욕망에서 학문과 종교를 시작했다. 결코 단순한 호기심이나 경이심에서가 아니다(59).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거나 적어도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예: 사피어, 워프), 사고가 언어를 결정한다는 주장(예. 피아제), 언어와 사고가 상호의존적이라는 가설(예. 비고츠키), 그리고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적이라는 주장(예. 촘스키) 등이 그것이다(70).
이디스 해밀턴이 바로 지적했듯이, 그리스인은 인류 최초로 경기와 경연을 즐겼던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삶의 기쁨과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비참하거나 억압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경기와 경연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리스의 축제 기간에 했던 경연과 같은 것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해밀턴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집트에는 무덤이, 그리스에는 극장이 있다”라는 멋진 말로 남겼다(77).
이번 장에서 우리는 호메로스가 씨앗을 뿌리고, 이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키운 생각의 도구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 순서다. 나는 이것들이 우리의 사고와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가며,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어떤 역할들을 하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앞서 1부 1장에서 우리는 생각의 도구들이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움직이기 위해, 다시 말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들 가운데 은유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든 곳에 사용된다. 원리와 수는 주로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에 비해 문장과 수사는 애초부터 사람들을 설득하여 움직이는데 사용되었다.
2부 1장에서 우리가 범주화와 혼성을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1차적 생각의 도구’, 또 우리가 거의 의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생각 이전의 생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볼 생각의 도구들은 ‘2차적’이고, 우리가 일상에서 항상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상적 생각의 도구’다. 그만큼 우리에게 가깝고 중요하며 학습을 통해 그 사용법을 익힐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만일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이 같은 생각의 도구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일상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와 아이들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이루어온 지적 진보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창의적인 직업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주 낮아진다. 한마디로, 앎의 폭이 좁아 능력의 범위가 축소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145).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쯤, 그러니까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도 거의 모든 대학 교재의 첫 장은 그의 말을 한 마디쯤 다루고 시작한다. 대부분의 학문들이 그로부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만 보더라도 그는 천재들 가운데 천재였다. 그런 그가 천재의 속성에 관한 은밀한 비밀을 엿보게 하는 말을 <시학>에 살짝 흘려놓았다.
“이것은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상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169).
뇌과학 100년의 연구 결과중 대표적인 세 가지를 꼽을 때마다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이 있다. ‘뇌신경가소성neuro plasticity'이다. ’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라는 뜻이다. 무척 단순하게 보이는 이 말 안에 실로 경이로운 인간 뇌의 비밀이 내재되어 있다. 뇌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신경세포들이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해 생각을 만들 뿐 아니라 그 생각에 의해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열린 구조로 설계된 시스템이다. 따라서 뇌는 경험에 따라 형태(크기와 구조)가 바뀐다(171).
하나의 은유가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사유 체계 전체를 보여준다! 마이더스의 ‘손’, 이카로스의 ‘날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수많은 신화적 은유에서 ‘손’,‘날개’,‘침대’와 같은 이미지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신의 사상을 이미지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능력은 탁월한 학자들이 지닌 공통점이다(175).
원리라는 생각의 도구는 면밀한 관찰과 치밀한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다. “미지의 것은 모두 훌륭해 보인다omne ignotum pro magnifico”라는 고대의 격언이 있지 않은가! 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란, 그가 천재이든 아니든 모두 열정적 관찰자이자 동시에 주의 깊은 사고자일 뿐이다(206).
100년쯤 전에 수학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났다! 19세기 말에 ‘비유클리스 기하학’이 등장함으로써 수학이 단일한 체계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연이어 20세기 초에 괴델의 ‘불완전성원리’가 발표되면서 수학이 완전한 체계가 아님도 증명되었다(345).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20세기 중반에 이미 이와 같은 정황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용어를 개발했다. ‘몰아세움das stellen’과 닦달das gestell'이다. 근데 이후 인간이 자연과 자기 자신을 기술적 제작과 조작의 재료로 몰아세우고 닦달한다는 뜻인데, 내 생각에는 근대인들이 개발한 자연의 수량화가 근본 원인이다(361).
‘피타고라스 따라하기’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로 이 같은 마술을 걸자는 뜻이다. 수학을 단지 계량과 계산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도구로서 인식하게끔 교육하자는 말이다. 다시말해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 사람들처럼 가능한 한 수학을 이미지화하여 다른 학문 내지 예술과 연결시키고, 가능한 한 수학을 철학화하여 수학에 미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의미를 부과하여 교육하자는 뜻이다(365).
만일 그렇지(설득하지) 못하면 직장에서, 사업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도 실패할 것이고, 곧바로 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383)
-> 이 부분은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임. 실용만 있는 것이 수사인가?
실용성, 이게 중요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수사학적 논증을 단지 고대의 미숙한 논리학이라고 보기 보다는 ‘논증의 자연언어적 형태’ 내지 ‘유연한 논리학soft logic'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411).
당신에게 권하는 토피카는 바로 이런 자료집이다. 만일 당신이 말이나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다시 말해 설득력 있는 프레젼테이션, 연설, 설교, 토론 등을 하고 싶거나 뛰어난 에세이, 칼럼 또는 논설문을 쓰고 싶다면, 평소에 이런 토피카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필요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꺼내 사용해야 한다. 그 안에는 다양한 주제의 고사성어, 격언, 속담, 역사적 사실, 인정된 학설 등은 물론이고 최신 자료들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곧 바로 꺼내 적절하게 사용할 것이 아닌가(420).
이처럼 상당수의 대증식에서는 모범적인 예가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증식은 삼단논법과 예증법을 결합한 형태의 논증이라 할 수 있다. 최강의 조합이다! 이것이 대증식이 강한 설득력을 가진 이유다(434).
조목조목 증거를 대라.
대증식epicheirema은 전제 하나하나마다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붙임으로써 설득력을 강화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기본 구조는 ‘[전제1] - [전제1 증거] - [전제2] - [전제2 증거] - [결론]’,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432).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의 프레젠테이션 기법
목표
예비주제 A.
예비주제 B.
예비주제 C.
주제A
근거1.
근거2.
근거3.
결론A
주제B
근거4.
근거5.
근거6.
결론B
주제C
근거7.
근거8.
결론C
결론 요약A
결론 요약B
결론 요약C
제안!
(434-435)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쇄식aristotelian sorites, 또는 간단히 줄여 연쇄식이라고도 불리는 연쇄삼단논법sorites syllogism은 둘 이상의 삼단논법을 모아 하나의 연결체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는 논증법이다. 방법은 앞에 전개된 삼단 논법의 결론을 다음에 오는 삼단논법의 전제로 사용하여 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쇄삼단논법의 기본 구조는 ‘[전제1] - [전제2] - [결론1] - [전제 3] - [결론2]’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결론1]이 [결론2]의 전제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다(437).
우리가 3부 3장 ‘문장’에서 뇌신경과학을 통해 확인했듯이 퀸틸리아누스도 낭독lectio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권하고 싶은 것이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들을 소리 내어 낭송하고 가능하면 암기하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 또는 당신의 아이가 말이나 글에서 머리가 하얘지는 ‘백지의 공포’를 극복하고 ‘잘 다듬어진 능란함frima facilitas’을 습득하고 싶다면 말이다.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이라 하면 보통 시를 떠올리지만, 이번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은 산문을 말한다. 시는 문예적 수사가 탁월한 장르이지만 논증적 수사가 그만큼 약하다. 감성의 논리가 따로 있는 데다 과감한 생략 때문이다. 게다가 시의 낭송과 암송의 유익함은 3부 1장에서 은유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이미 소개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산문,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연설문들의 낭송과 암기를 권하고 싶다(446).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가 그렇듯이, 수학적으로 뛰어난 연설문의 낭송과 암송은 문체나 기예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의 뇌 안의 정신적 문법을 구성하고, 그것이 만드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시나 연설문을 낭송 또는 암송할 때 우리의 뇌에서는, 동양화를 배우는 사람이 스승의 작품을 복사하거나, 작곡 공부를 하는 사람이 기존의 훌륭한 작품을 베껴 쓸 때(이 일에는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가 전범이다)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때 우리의 뇌는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의 패턴을 모방한다. 그럼으로써 언어와 학문, 그리고 예술을 익히고 재창조한다(447-448).
정보와 지식은 어디서든 전송받을 수 있지만, 진실과 지혜는 아무 데서도 전송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진정한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현장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진실과 지혜이고, 우리 사회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손에 든 뇌가 아니라, 오직 머리 안에 든 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457).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학자, 전문가, 지도자들이 만들어서 도서관, 강의실, 영화관, 음악당에 쌓아놓은 정보와 지식들을 든 손에 뇌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그리고 머릿속에 든 뇌에는 그것들을 꺼내어 새로운 전망과 판단, 그리고 이에 합당한 지식을 만들어낼 생각의 도구들을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본문에서 살펴본 은유, 원리, 문장, 수, 그리고 수사를 말이다. 이것들은 부드럽고 유연하고 포용적이고 설득적이다. 또 유능하고 창조적이다.
우리는 외눈박디 키클롭스가 아니다. 제 머리를 들고 다니는 성 드니는 더욱 아니다. 우리는 머리 안에 든 뇌와 정보기기 안에 내장된 뇌, 달리 말해 유사성을 근거로 한 패턴을 통해 일하는 뇌와 동일성을 근거로 한 패턴을 통해 작업하는 뇌, 2개의 뇌를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럼으로써, 또 그래야만,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인류가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새로운 문명의 세계로 설레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463).
총평: 저자가 예전에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 문학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끌어낸다. 생각의 시대를 아우르는 큰 대지(大智)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스 시대에를 다시 볼 수 있는 혜안과 여러 정보-저자의 용어로 토피카-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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