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레이코프ㆍM. 존슨, 『몸의 철학: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 임지룡 외 역, (서울: 박이정. 2002).
어떤 대상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방식은 그 대상을 쥐고 있는 것, 즉 그 대상을 계속 소유하는 것이다(399)
->자율성 은유
당신이 모든 인간과 공유하는 합리성이라는 보편적인 본질에 더하여, 개인으로서 당신은 당신을 고유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즉 당신을 당신으로 만들어 주는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다. 당신을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당신답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의 본질이다(415).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자유, 그리고 선택의 필연성뿐이다(왜냐하면,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자유(freedom)와 진실성(authenticity)은 실존주의의 구호이다. 다른 사람의 도덕성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때, 당신은 진실성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진실성이 이 틀안에서 조금이라도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이 되어야만 할 '자아'는 없다. 결코 '진실한' 당신이 없는데, 어떻게 당신이 '거짓될'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에게 자유를 남겨준다. 아버지(신, 이성, 일반 의지, 본질)는 죽었다. 그래서 당신은 (상황의 한계 내에서) 당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 실존주의자의 관점에서는 그 의사의 이런 행동(동료를 돌보기 위해 죽음의 도시에 머무는)에 어떤 방식이든 찬사를 보낼 근거는 없다. 우리는 다만 그러한 보살핌과 배려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478).
도덕적 개념들과 추론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의 어떤 측면들을 겨냥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추론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과학적 판단과 기술적 판단, 사려적 판단, 미적 판단, 윤리적 판단들이 있다. 각 유형의 판단에는, 상응하는 독특한 유형의 문자적 개념들이 있다. 따라서 오직 윤리적 논점들에만 해당하는 개념들의 특이한 집합이 있다. 이러한 윤리적 개념들은 문자적이며, 오직 "그 자체만으로" 또는 순전히 윤리적인 다른 개념들에게 대한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도덕적 규칙들과 원리들은 이처럼 순수하게 윤리적 개념들 그리고 선과 권리, 의무, 정의, 자유와 같은 개념들로 구성된다. 어떤 주어진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서 이 윤리적 개념들과 규칙들을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상황들에 적용한다(484).
->자율성 잣대가 이성만 아닌 이유
[자율적인 합리적 자아] 합리성에 관한 전통적 관념은 칸트의 자율성 개념과 함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자로서의 인간관을 낳았다. 즉 인간은 완전한 의지의 자유와 초월적 어떤 것인가 사고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의도와 믿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는 초월적 합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릇된 것이다. (775)
푸코(M. Foucault)가 그의 저작들을 통해 지적했던 것처럼, 그리고 도덕성에 관한 우리의 논의(14장)과 칸트의 윤리학(20장)을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서 크게 제약받는다. 인지적 무의식은 푸코적 의미에서 힘, 즉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를 지배하는 힘의 중심적 소재이다.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개념체계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을 제한하며, 칸트가 우리에게 부여했던 종류의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775-776)
더욱이 우리의 합리성이 신체화되어 있는 방식들은 완전 자율성과 같은 어떤 것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의 개념들 중 많은 것이 몸에 대한 내재적 제약, 예를 들아, 공간관계 개념들로부터 발생한다. 둘째, 우리가 개념들을 배울 때 그것들은 우리의 몸의 일부가 된다. 학습된 개념들은 시냅스의 항구적이거나 매우 장기적인 병화를 통해 신체화 된다. 우리의 개념체계의 대부분은 매우 심도 있게 신체화되어 있어서 적어도 어떤 의지적 해우이에 의해서, 그리고 결코 빠르고 쉽게 탈학습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776)
이것이 우리가 무의식적 개념체게 안에 항구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정도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항상 사용하게 될 <그릇>, <경로>, <사건-구조> 은유, 그리고 다른 수많은 개념들이 우리 두뇌 안에 강하고 깊게 신체화되어 있기 때뭉에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고할 것이다(776)
그러나 우리는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념화에 결정적인 자유를 주는 적지 않은 인지적 유연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들에 관해서 복합적 은유를 갖기 때문에 그 은유들은 가끔 우선성이 재조정된다. 다른 것들에 우선해서 특정한 은유들을 배우거나 새로운 은유들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은유들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의식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이해의 방식을 낳는다. 복합적 개념들과 세계관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기본 개념들과 은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복합체를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 또하느 우리는 반성이 가능한 의식적 존재이기 때뭉에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의 사용을 관찰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776).
인지과학에는 인간의 자유에 기여하는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적 개념체계가 어떤 것인지,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배우는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대부분의 사고가 무의식적이라는 것, 우리가 은유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사실상 인지적 무의식의 노예가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합리성을 갖는다는 가정은 실제로 우리의 합리적 자율성을 제한한다. 그것은 우리를 인지적 노예 상태, 즉 무의식적 은유들에게 대한 의식되지 않고 무비판적인 의존 상태로 전락시킬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개념적 자유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대부분의 정신적 삶을 지배하는 신체화된 인지적 무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들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한다(777).
-> 자율성을 위해서는 검증된 지식의 합리적 선택도 중요하지만 자기 성찰(반성)이 중요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적인 자아를 살필 필요가 있다. 교육->자율성->합리성/자기반성(성찰). 현재 교육은 지식 전수(합리성)만 강조한 채 자기 반성력을 길러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을 돌볼 틈이 없다. 대학 나와서 군대에 다녀와서 자신을 보게 된다. 그때는 너무 늦는다.
->비판적 사고를 할 때 '의식+무의식'까지 고려해야 한다.
상당히 긴 시간 안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명확하고, 보편적이며 일관성 있는 '자기 이익'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805).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타주의로 간주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인지적 무의식(the cognitive unconscious)을 구조화하는 가족 토대적인 도덕적 틀을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점이다(807)
-> 개인이익보다는 '가족 토대적인 도덕적 틀'을 봐야<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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