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30. 오후
서울 용산역에서 윤장래 소장님을 두 시간 반여 만났다.
대가와의 만남은 늘 큰 혜안을 준다.
후기를 기록한다.
출처 - 윤장래 소장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anglae.yun?fref=ts)
간단한 인사 후 그가 처음 건낸 말씀이다.
명함을 건낸다.
샘스토리에서 만들어주신
'미래교사 최만'이라고 새겨진 명함이다.
라는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만나는 목적(출판 관련 이슈 배우기)보다는
이야기가 2시간이 넘어가서 진행된
인간적인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보려 한다.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연배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내가 요즘 병원에 다니는 데 비알콜성 지방간으로 다닌다.
이 병은 과체중, 많이 먹어서 영양이 과섭취되어서 생긴 병이다.
우리 모두가 비알콜성 지방간에 걸려 있다. 우선 10키로라도 빼어야 한다.
체중이 10킬로가 업 되면 모든 것이 어떤 상태일까?
이 시간에 병원에 가는 것은 우리에게 시그널을 주는 것이다.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다.
"너, 지금까지 해왔던 부분에서 스탑을 한 번 걸어봐."
"다시 한번 엎어봐. "
"거기서 챙겨봐. 나머지는 버리고 이런 메시지를 버리고"
바쁜 것이 좋은 건가요? 일중독자인 것 같은데, 거꾸로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최만이라는 사람은 어디있지? 일을 하면서 내 존재감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선생님은 앉아서 하는 일을 반절하고, 돌아다니는 일을 반절해야 합니다.
가치 우선 순위를 리셋해야 한다.
다 엎어불고, 1번 부터 다시 메이킹을 해야 한다.
주로 나는 이런 강의를 한다.
생애설계, 연령경영, 인생, 죽음, 인문학적인, 50대 이후에 어떤 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
집이란 자기 재산에 대한 결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삶을 바꿀 수 없다.
존듀이는 교육이라는 것을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배움 자체가 삶이라고 한다.
배워서 뭘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자체가 삶이다.
우리는 배움 현장과 삶의 현장이 분리되어 있다.
학교 교육 맹탕, 사회 교육 다시 배우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맞지가 않다.
사회 관계능력을 삶에서 배워야 한다.
결핍을 느끼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야한다.
옆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미래 세대를 담당하는 교육자라면 가치철학이 있어야 한다.
생활이 어떤 사람이 되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원하는 세상은 어떤 건가 이걸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인간 최만은 보편적인 인간으로 활동하라.
사람답게 표징을 하면서 살아가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뭐에 시간을 할당했는 가가 그 시절의 최만일 것이다.
그 시절에 뭐에 미쳐있는가가 나의 정체성일 것이다.
너 꿈이 뭐야 라는 질문을 하면 안 된다.
라고 물어야 한다.
직업으로 우리를 물면 안 된다.
책은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대화를 안 한다.
책을 보는 순서를 바꾸라.
어떤 형태로든지 그 사람의 강의를 먼저 들으라.
그럼 책을 보면서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
책을 보면서 그 사람이 여기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보고 사람을 안 보면 그냥 글자다.
그 사람이 강의를 잘 하든 못 하든 간에, 뭔가 명성이 있고, 평판이 있다면 그 사람을 먼저 만나서 들을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 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 책을 빨리 봐야 한다. 이 때 만나고 나중에 보면 이 때 감을 내가 유지를 못한다.
이 사람에 대한 느낌을 갖고 책을 보면,
책이라는 것은 이 사람과 1박2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을 이 사람과 놀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느낌이 있으면 메일을 보낸다.
그러면 관계가 만들어진다.
강의를 듣고 책을 보면 내 인간적인 고민을 이 사람이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선생님 강의를 듣고 책을 봤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평상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메일을 보내봐라 그 선생님이 답변을 안 할 것인가?
스승은 이렇게 모시는 것이다.
책의 용도는 이것이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것은 반대다.
하나의 지식중독이다. 학습중독이다. 일 중독자와 똑같다. 쇼잉이다. 자기 스스로 만족이다. 그냥 진정한 자기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평가가 자아로 형성되서 그 또 다른 나가 만족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시욕이다.
이 지식이 잘못하면 폭력이 될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을 기를 죽인다거나 억압의 기제로 사용할 수가 있다.
나는 좋은 스승님들 앞에 시행착오 끝에 배웠다.
인간은 비교하는 순간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풍선과 같아서 적당량의 마이너스 기운이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 게임이다.
사람이 헛개비와 같아서, 기운이 있다.
풍선을 묶어 놓아도 바람이 쭉쭉쭉 빠진다.
늘 빠진다는 전제에서 에너지를 넣어야 한다.
일상적인 감사, 칭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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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로 만났는데, 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굉장히 시원한 느낌이 든 만남이었다.
큰 스승님을 만나서 행복하다.
만남이 재미 있는 이유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역에서 윤장래 소장님을 두 시간 반여 만났다.
대가와의 만남은 늘 큰 혜안을 준다.
후기를 기록한다.
출처 - 윤장래 소장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anglae.yun?fref=ts)
"결혼하셨어요?"
간단한 인사 후 그가 처음 건낸 말씀이다.
"총각 같아요."
"속이 없어서가 아니라, 열정이 있어서 그렇죠"
명함을 건낸다.
샘스토리에서 만들어주신
'미래교사 최만'이라고 새겨진 명함이다.
"미래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라는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만나는 목적(출판 관련 이슈 배우기)보다는
이야기가 2시간이 넘어가서 진행된
인간적인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보려 한다.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연배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내가 요즘 병원에 다니는 데 비알콜성 지방간으로 다닌다.
이 병은 과체중, 많이 먹어서 영양이 과섭취되어서 생긴 병이다.
우리 모두가 비알콜성 지방간에 걸려 있다. 우선 10키로라도 빼어야 한다.
체중이 10킬로가 업 되면 모든 것이 어떤 상태일까?
이 시간에 병원에 가는 것은 우리에게 시그널을 주는 것이다.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다.
"너, 지금까지 해왔던 부분에서 스탑을 한 번 걸어봐."
"다시 한번 엎어봐. "
"거기서 챙겨봐. 나머지는 버리고 이런 메시지를 버리고"
바쁜 것이 좋은 건가요? 일중독자인 것 같은데, 거꾸로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최만이라는 사람은 어디있지? 일을 하면서 내 존재감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선생님은 앉아서 하는 일을 반절하고, 돌아다니는 일을 반절해야 합니다.
가치 우선 순위를 리셋해야 한다.
다 엎어불고, 1번 부터 다시 메이킹을 해야 한다.
주로 나는 이런 강의를 한다.
생애설계, 연령경영, 인생, 죽음, 인문학적인, 50대 이후에 어떤 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
집이란 자기 재산에 대한 결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삶을 바꿀 수 없다.
존듀이는 교육이라는 것을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배움 자체가 삶이라고 한다.
배워서 뭘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자체가 삶이다.
우리는 배움 현장과 삶의 현장이 분리되어 있다.
학교 교육 맹탕, 사회 교육 다시 배우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맞지가 않다.
사회 관계능력을 삶에서 배워야 한다.
결핍을 느끼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야한다.
옆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미래 세대를 담당하는 교육자라면 가치철학이 있어야 한다.
생활이 어떤 사람이 되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원하는 세상은 어떤 건가 이걸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인간 최만은 보편적인 인간으로 활동하라.
사람답게 표징을 하면서 살아가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뭐에 시간을 할당했는 가가 그 시절의 최만일 것이다.
그 시절에 뭐에 미쳐있는가가 나의 정체성일 것이다.
너 꿈이 뭐야 라는 질문을 하면 안 된다.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거기서 너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라고 물어야 한다.
직업으로 우리를 물면 안 된다.
책은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대화를 안 한다.
책을 보는 순서를 바꾸라.
어떤 형태로든지 그 사람의 강의를 먼저 들으라.
그럼 책을 보면서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
책을 보면서 그 사람이 여기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보고 사람을 안 보면 그냥 글자다.
그 사람이 강의를 잘 하든 못 하든 간에, 뭔가 명성이 있고, 평판이 있다면 그 사람을 먼저 만나서 들을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 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 책을 빨리 봐야 한다. 이 때 만나고 나중에 보면 이 때 감을 내가 유지를 못한다.
이 사람에 대한 느낌을 갖고 책을 보면,
책이라는 것은 이 사람과 1박2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을 이 사람과 놀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느낌이 있으면 메일을 보낸다.
그러면 관계가 만들어진다.
강의를 듣고 책을 보면 내 인간적인 고민을 이 사람이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선생님 강의를 듣고 책을 봤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평상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메일을 보내봐라 그 선생님이 답변을 안 할 것인가?
스승은 이렇게 모시는 것이다.
책의 용도는 이것이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것은 반대다.
하나의 지식중독이다. 학습중독이다. 일 중독자와 똑같다. 쇼잉이다. 자기 스스로 만족이다. 그냥 진정한 자기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평가가 자아로 형성되서 그 또 다른 나가 만족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시욕이다.
이 지식이 잘못하면 폭력이 될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을 기를 죽인다거나 억압의 기제로 사용할 수가 있다.
나는 좋은 스승님들 앞에 시행착오 끝에 배웠다.
인간은 비교하는 순간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풍선과 같아서 적당량의 마이너스 기운이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 게임이다.
사람이 헛개비와 같아서, 기운이 있다.
풍선을 묶어 놓아도 바람이 쭉쭉쭉 빠진다.
늘 빠진다는 전제에서 에너지를 넣어야 한다.
일상적인 감사, 칭찬이 필요하다.
----
나는 일로 만났는데, 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굉장히 시원한 느낌이 든 만남이었다.
큰 스승님을 만나서 행복하다.
만남이 재미 있는 이유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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